[디아티스트매거진=황희지] 빌 비올라는 감각적인 영상작업을 통해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 내면의 심오한 특질들을 마주하게 한다. 작가는 큰 스케일의 작품과 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암실 등의 장치를 사용하여 영적 체험에 의한 ‘숭고’의 감정을 극대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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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verted Birth>▲ 출처=http://afasiaarchzin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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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rted Birth, 2014> 전시장을 가득 채운 대형스크린에는 서서히 쏟아지는 액체에 잠식당하는 한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느리게 진행되는 내러티브 속에서 관람객들은 어느 순간, 이 영상이 시간의 틀에 지배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액체는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것이었으며, 남성은 잠식당하는 모습이 아니라, 깨끗이 정화되는 모습인 것이다. 결국 남성은 無의 상태로 결말을 맺고, 관람객들은 시간(slow motion)에 의해 지배당한 우리 지각의 근원구조에 대한 역설과, 리버스모션(reverse motion)에 의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던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 변화에 대한 재인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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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ter Martyr> 출처=http://www.tate.org.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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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 Martyr, 2014> 순교자 시리즈中 한 작품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남성의 발목에는 두꺼운 밧줄이 묶여 있다. 남성은 밧줄에 의해 거꾸로 매달리게 되고, 그 순간 폭포수 같은 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마치 폭력적인 박해의 순간에 더욱더 굳건해지는, 순교자의 숭고하고도 의연한 모습을 상징하는 듯, 남자는 물의 세기가 세질수록 초연한 모습일 뿐이다. 그는 ‘물’이라는 세상 만물의 근원적 요소, 즉 세상(물)에 의한 고통 속에서 찬연하는 인간 존재를 순교자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이처럼 비올라의 작업에는 ‘물’이라는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영적체험, 임사체험을 기반으로 한 그의 영상은 ‘물’과 관련된 그의 어릴 적 체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실제로 6살에 호수에 빠진 경험이 있는데, 그곳에서 느낀 푸른빛의 심연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 삼촌의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그를 매혹시켰던 ‘물’의 세계는 ‘죽음’의 상징이자 ‘유토피아’이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 마주했던 초월적 세계는 그의 작업의 주를 이루는, 영적 체험의 발현이자,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정신적, 심리적 의식의 흐름에 대한 탐구와 함께, 내면의 영적경험을 통한 자의식에 대한 ‘숭고’를 제시한다.
관객 대부분은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고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죽음’은 결국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이상적인 공간이다. ‘더 이상의 고통은 없다는 것이 죽음을 환영할 만큼 매력적인가’라는 점은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항상 큰 의문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과 불안감은 죽음을 ‘고통의 끝’이 아닌 ‘삶의 끝’으로 정의하여 나를 포함하여 실재하는 모든 것의 ‘상실’을 암시한다. 모든 것을 잃는 죽음, 상실감에 대한 고통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순교자는 죽음의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 나 자신의 상실조차도 극복해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 죽음은 ‘초월’의 공간이 되며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숭배의 대상이 된다.
빌 비올라가 어릴 적 죽음의 경험으로부터 푸른빛의 찬란한 심연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죽음을 초월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기 이전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상실에 대한 두려움보다 ‘죽음’이라는 새로운 체험에 매료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릴 적의 빌 비올라와 순교자는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과정에 있어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순교자가 상실감의 극복을 위해 수행한다면 어릴 적의 비올라는 애초에 상실이라는 감정에 대해 불안함이 없다. 아이에게 죽음이란 천진하고도 새로운, 또 다른 놀이 공간인 것이다.
과정은 다르지만 어릴 적 경험했던 죽음에 대한 천진함은 그가 성장하여 죽음과 상실을 동일선 상에 두기 시작할 수 있는 일반적인 나이가 되었을 때에 상기되어 ‘순교자’의 초월함에 한발 다가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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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Cross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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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ossing, 1996> 이 작업은 그의 초기작품들과 더불어 ‘물의 쏟아짐’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사용한다. slow motion을 통한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영적 체험을 제시하는 것은 동일하나, <inverted birth>의 직접적인 깨달음, 감동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빌 비올라는 시간의 구조를 변형시킨 ‘느림’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인간 존재에 대한 ‘응시’의 여지를 준다. 무미(無味), 무취(無臭)에 가까운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며 각성시키기 보다는 무료하고 재미없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 자신과 마주하는 무료한 ‘응시’의 과정 속에서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던 ‘나’라는 인간 존재의 감정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느리기 때문에 보이는, 역순행이기에 보이는 우리 의식의 실체는 지금껏 간과해왔던 감정 구조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나’라는 개별 존재이기 이전의, ‘인간’을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때로는 ‘순교자’가 되기도 하고, ‘만물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관람객들은 언제 시작하는지 혹은 진행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의 영상을 감상하면서 기대감과 무료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는 가장 사실적이고 물질적인 재료인 비디오를 통하면서도, 시간의 역설을 제시하여 우리에게 추상적인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료하고 느린 영상 속에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행위,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선을 통해 지금껏 삶과 유리되어 있던 우리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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