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 a Lonely Road, Clearest Day Alive, 영화 <바닐라 스카이>
김범진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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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디아티스트매거진=김범진] 영화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데이빗(톰 크루즈)의 꿈에는 나비가 날지 않으며, 그 안에서는 데이빗도 나비가 아니다.
향기 없는 삶에서도 펄럭였던 데이빗은 진한 삶의 악취를 남기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마지막 발자국에서 시작되는 그가 꾸는 꿈은 그의 통증을 약간 덜어낸다. 만들어진 행복은 충분히 달콤해서 지나쳐온 삶의 씁쓸함을 지워주었고, 효과 좋은 탈취제는 데이빗이 현실에서 만들어내지 못한 향기를 피워내지는 않지만 꿈에서나마 그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과 보다 나은 자신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죄책감 – 또는 그와 유사한 파괴력을 가진 감정 – 은 꿈 안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그의 순간을 횡으로 긋는다. 그 틈에서 새어나오는 건 지워져 가던 현실과 꿈의 경계선이고, 얇은 선에서 시작된 착오와 의문은 그의 행복을 다시 뒤덮는다. 기억의 저변에서 또는 꿈 속에서 잠시 헤메며 데이빗이 주운 파편들은 빛을 잃는다. 쓸데없는 의심과 희망과 회한과 회상들이 뒤얽힌다. 그렇게 ‘바닐라 스카이’는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혼란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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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1. 선택
제조된 행복과 깨지 않는 꿈은 그 모든 구성각편 각자가 인위적이지 않다고 착각될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으며 일체로써 그래야만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 작은 일부라도 꿈이라고 인식한 이상, 거기에서 피어나는 의심은 꿈을 현실에 비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그 추락은 꿈이 결코 가지지 못하는 현실성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가속되며 비가역적이다. 데이빗이 그랬던 것처럼, 아예 꿈에 속거나 아예 현실로 돌아오거나의 두 가지만 있을 뿐이지 의심을 품고 살아가기엔 그 의심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것은 꿈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
종이에 그려진 연필선을 벅벅 지워도 눌린 흔적은 남는 것처럼 미세한 덧칠에 의해 요철이 드러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선은 데이빗의 꿈이 현실을 침식하며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의심을 딛고 둘의 경계를 반전하며 꿈을 꾸는 주체와 현실을 사는 주체의 균형을 깨뜨려가며 자신의 지분을 주장해 그 크기를 키운다. 그가 꾸었던 긴 꿈은 현실과의 거리감이 희미했던 탓에 짙었고, 단지 짧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버려졌던 삶에 비해 화려하여 착란의 기저에서 현실을 살았던 데이빗은 꿈을 꾸는 데이빗을 놓아주지 않고 꿈에서 흘러나오는 달달한 진통제를 좀 더 핥으려 한다.
꿈에서 깨지 않으려는 데이빗의 무의식과, 깨어나 현실을 바라보려는 데이빗의 의지는 그렇지만 은근하게 충돌한다. 생존의 본능대로 고통을 피하고 안식과 행복을 향하도록 현실의 데이빗은 꿈의 데이빗을 놓고 싶어 하지 않으며 꿈의 데이빗도 같은 크기만큼 현실의 데이빗을 유혹한다. 그리고 이건 어느 정도까지는 유효하게 균형을 이루어 데이빗을 지속적으로 기만한다. 영화의 말미에선 데이빗이 선택하기는 한다. 그가 밟아온 땅 또는 꿈은 그림 속에 박제된 하늘처럼 아름다웠으나 지속적이지 않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지만 또 그래서 추악하다는 것을 깨닫고 크나큰 고통을 덮었던 더 큰 기만을 기각하며 꿈에는 없었던 고통을 끌어안고 다시금 삶을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햇볕이 닿지 않는 차가운 관 안에서 그는 꿈의 향기나마 피워내어, 정지된 시간을 조각하여 온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의 행복의 모든 열량의 총합은 살아 숨쉬는 그의 체온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비교 가능한 성질이지도 않다. 그걸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데이빗의 착오 중 하나이며 그만큼 그가 꾸는 꿈이 불안정해진다. 차갑고 추적추적한 겨울비에 젖은 밤의 길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잠시 떨었던 것이 무서워서, 그가 버려두고 왔던 삶의 흔적들은 그의 발목을 잡고 죄책감이라는 모양의 손자국을 남긴다. 그의 무의식은 그가 꿈에서 허덕이던 시간을 교란해내었고, 당시의 그는 설탕에 절여진 과일처럼 지나친 달콤함에 수분과 생명력을 빼앗기며 잘생긴 박제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물론 다행이도, 데이빗은 잘 만들어진 꿈 안에서의 이질감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달린다. 너무나도 현실과 닮았고 고난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양념으로 기능시키는 그런 인위적인 꿈 안에서의 이질감은 처음에는 그를 혼란에 빠뜨리긴 하지만 소중한 것이었다. 마지막에서 그간의 행복을 가속하는 꿈의 절대적인 종속성과는 다르게 그는 현실을 택한다. 그의 선택의 이면에는 지속적으로 무의식의 결 사이에 파고들어 자리하고 있었던, 단지 손을 들고 말할 기회가 없을 뿐이었던 그의 의지가 있었다. 그 의지는 ‘현실보다 나은 꿈’이 아닌 ‘현실’을 살고 싶은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이었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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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2. 선택지
현실을 향한 그의 선택에서는 그런 인간다움과, 다양한 모범답안들이 모여서 완성해가는 인간성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 있으며 그에 대한 그만의 답안지를 엿볼 수 있다. 무의식에 의해서마저도 쉽게 부패하고 망가지는 것이 꿈이라면, ‘현실을 대체할 꿈’으로서 한없이 정밀하게 다듬어지고 또 세밀하게 그 주체를 속일지라도 현실에 극한으로 가까운 모조품에 불과하다. 결코 꿈은 현실을 현실성으로 이기지 못한다. 꿈의 정의는 현실의 정의 외곽에 위치하며 논리의 상대성으로 성립가능한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개념의 구분의 거리는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단절되어 있으므로 둘 사이의 경계에 의해 한정된 하나와 무한한 상대방으로 서로를 정의할 뿐이지 둘은 섞이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비현실의 가장 바깥쪽은 현실과 맞닿아서 둘 사이의 경계선을 구성하고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둘은 서로를 모방할 수야 있겠으나 말했듯이 섞일 수는 없다. 모방한다는 것의 전제 또한 둘의 다름이기에 꿈은 현실과 아무리 닮았어도 경계에 발을 디밀 수는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데이빗에게 제시된 오류 없는 꿈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회사의 상술인 것이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부족한 기술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의 별개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인간의 상상력이나 여타 어떠한 것으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멀건 안개가 낀 연못가에 드러누워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바람과 향기와 온기가 아무리 속일지라도 감각으로 예상되는 현실은 현실의 껍데기의 모양을 모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의 전체를 인식할 수야 물론 없다. 하지만 그 경계선의 어느 쪽에 서서 그걸 측량하고 있을지는, 달리 말해 실제 현실을 살아가면서 현실을 알아가는 것과 현실 밖에서 현실을 닮은 내일을 하염없이 그려가며 좀 더 닮아가기를 바라고 자신의 희망과 소망을 반영하여 꿈꿔왔던 시절을 조금이라도 덧붙이고자 그걸 방해하는 요소들을 자신 몰래 유기하고 그려가는 그 모습은, 현실의 실재성이라는 측정치에서만큼은 양 극단에 있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예술은 삶을 모방한 예술보다 삶의 속성에서는 언제나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예술 중 삶을 모방하는 예술을 삶의 속성만으로 삶과 비교하고 폄훼하지는 않지만, 그건 별개적인 감상과 의미의 문제인 것이고, 데이빗의 꿈은 예술의 속성이 아닌 기술의 속성을 가졌기에 ‘모조품’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분위기를 결코 피하지 못한다. 그가 구입한 꿈은 손쉬운 감상의 대상이 아닌 삶의 대체물이었기 때문에 창작물의 창작완성도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분리하여 관할할 속성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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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3. 선택의 주체
영화에서의 꿈은 단적으로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내 주체를 속이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을 돕도록 하는 목적이 있어서 감정에 호소할 수 있을 뿐, 쉽게 증거를 통해서는 변호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굳이 그을 필요는 없다. 꿈도 현실도 언제나 주체는 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꿈은 ‘현실의 대체물’로서의 꿈이 아닌 ‘꿈 자체’를 의미한다 할 것이며 영화에서야 데이빗이 선택을 해서 그렇지 그가 깨어난 현실에서도 그가 있는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손쉬우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꿈속에서 지나온 시간과 실제로 살아갔던 현실의 시간의 총합을 각각 비교하였을 때 둘이 비등비등할수록 혼란은 가중될 것이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정된 현실을 살아가며 꿈에 취해 깨어나지 못했던 시간들보다 그 현실들이 짙고 깊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꿈 안에 그가 있는지 아니면 그 안에 꿈이 있는지는 그의 선택의 문제에 앞서는 동일성의 문제이고 차이점을 소각하고 발견해낼 동일성의 형태는 결국 그라는 하나의 주체의 모양을 가진다. 그가 디디고 있는 땅과 바라보는 지평선에 무엇이 있느냐의 차이가 꿈과 현실의 차이이지 실질적으로 정신과 인식의 측면에서 그 둘을 분별하는 것은 사유의 주체가 어차피 본인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꿈에는 현실에는 없는 절대적인 종속성이 있으며 그건 주체가 원하는 바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만들어진 현실을 모방한 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래 봐야 제작된 것이며 자연물이 아니다. 이걸 기만한다는 것은 놀이의 규칙을 잊는다는 것이고, 잊는다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기에 꿈이 아무리 주체를 속일지라도 언제나 현실과는 같을 수 없으며 두 주체가 같으므로 종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특정한 선택은 자신이 선택한 선택지가 아닌 다른 선택지의 갈림길로는 돌아갈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선택의 의지 말고는 나머지는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 꿈은 주체가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주체와 동일하거나 그 안에 속하는 것이고, 현실은 주체가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해서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차이가 많은 관계일 뿐 꿈과 현실은 앞서 말했듯이 주체가 동일하므로 뗄 수 없는 사이인 것도 맞다. 우리는 그 관계의 농담에 의해 꿈에서 깬 다음날의 미적지근한 현실감각의 상실을 경험하기도 하며 비릿한 기시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명 현실이 그런 것처럼 꿈에도 자체적인 의의는 있다. 둘은 상대방의 파편들을 주워서 나름의 방식으로 조현해내며, 때때로 우리는 거기에서 약간의 위로나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기도 한다. 꿈에는 상상력의 크기와 비슷한 수준의 절대적인 자유의 성질이 있고 현실에는 그것 대신 순수한 선택과 예측불가능성이 있기에 느리지만 단조롭지 않으며 그래서 양편 모두에서 주체는 빛을 어디에서 비추느냐에 따라 부각되는 형태가 달라지고 각각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현실의 모든 경우의 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지만 통제하려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진리의 조각들이 달콤함을 조금 나눠주기에 그걸 들이키고 다들 오늘을 걷는다. 모두들 잘 안다. 달콤한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며 씁쓸한 것이 매번 얼굴을 찌푸리게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상을 좇는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더듬는 것에 다름없으며 무한한 장님들이 더듬어 그려내는 코끼리의 이미지는 실제 코끼리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들은 코끼리를 본 것은 아니지만 만졌는데. 그래서 꿈으로는 이상을 그려낼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이상을 좇으며 살아가더라도 각자는 서로에게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향유하는 객체로서 같은 방향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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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시, 선택
얇고 납작한 꿈을 결을 헤치고 나선 그는 현실의 단단한 땅을 곧 밟을 것이다. 눈을 뜰 것이며 꿈꾸기 전의 인생에서 겪었던 실패와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역경들을 또다시 겪을 것이다. 마음대로만은 살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절망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절망은 그 전의 꿈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절망이다. 현실을 모방한 꿈에서는 규약들마저 스스로가 규율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제약이 있으며, ‘뭐가 나올지 모르는’ 초콜릿 상자이기에 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보람을 찾아낼 것이다. 그가 고른 것이 행여 절망일지라도, 그 근간에는 그 절망을 구성하는 자신의 삶과 생각과 시간과 주체성이 있기에 허무함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만들어낸 절망은 아니다. 그것이 그가 인간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고 꿈보다는 현실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의 등 뒤에서 행운을 빌어준다. 자신이 만든 절망은 언제나 선물 받은 절망보다는 절망스러우며, 그의 손에 들린 절망은 현실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수많은 선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연민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그에게 행운을 빌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가 꾸는 꿈이 현실에 상당하기를, 아니면 그의 현실이 그가 꿔왔던 꿈에 버금가기를 기대할 것이다. 희망을 이루는 것은 자신이고 희망을 희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꿈이라는 이상적인 환경에서 겪었던 모든 것들은 수치상의 극한에 자리하겠으나 그 주체가 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실에 돌아와서도 그걸 향유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또 아니다. 정신이나 상상력은 대체로 현실을 쉽게 앞서나가지만 그렇다고 그게 현실을 이겨낸다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그는 꿈을 참고하며 서로를 소비하고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도 그 둘이 서로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그저 그런 섞임과 혼화를 즐기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답안지에 적인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보통 다들 그걸 바라며 산다.
꿈결보다 질긴 생명의 끈을 붙잡고, 옅은 죽음의 향기를 기꺼이 들이마시며 삶의 악취를 손사래 쳐서 흐트러뜨리며 다시 뜬 두 눈의 주인은 꿈을 꾸는 주체인지 현실을 사는 주체인지, 그리고 그 둘 중 어느 자신이 보다 인간으로서의 본질에 가까운지를 선택하였기에 오랜 시간동안 감겨 있던 눈꺼풀의 무게보다 강한 눈빛으로 형형하게 앞을 바라볼 것이다. 그는 꿈의 말미에서는 추락하였지만 이제는 그러하지 않으며, 선택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에도 앞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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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광활하며 절망은 비좁다. 그래서 옅은 행복보다는 단단한 절망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지지만 질량의 총합은 행복이 언제나 크다. 현실로 돌아온 데이빗의 꿈을 구성했던 현란하지만 멈춰 있어 지루했던 설명문은 그가 직접 연필을 들고 써내려가는 따스한 수필이 되어갈 것이며, 이론보다 냉정한 삶의 그림자가 함께 하겠으나 매번 그를 무릎 꿀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길은, 그가 두고 온 다른 길처럼 빛나는 밤하늘의 어스름과, 청명한 가을 날 선물처럼 찾아온 꿈결 같은 하늘이 깔려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역경이 풍기는 패악의 향기마저도 달게 들이키기를 조용히 기다려 준다. 언제 옆에 왔나 싶은 고양이처럼, 그의 곁에서 언제까지나 같이 걸을 것이다.
(제목은 ‘Blink 182 – Even if She Falls’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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