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포스터 | ||
[THE ARTIST매거진=민소영]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진 않는다. 약간의 관심과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단 생각이 들지만, 그 대상이 불특정 타인이 아닌 가족으로 변하는 순간 발걸음이 더뎌진다. 집이나 쉼으로 그려지는 존재, 행복하고 조화롭게 굴러가는 공동체, 힘들 때 아무 말 없이 기댈 수 있는 사람들, 숨쉬고 누워있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모두가 안다. 가장 많은 부딪힘과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 가족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이해’가 쉽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스틸컷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는 이를 너무나도 잘 담고 있다. 칸이 사랑하는 차세대 천재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내놓은 세 번째 장편영화는 가족의 내면을 찬찬히 훑는다. 영화 초반, 종군 사진작가이자 아내이며 엄마인 이사벨(이자벨 위페르)이 말했듯, 이 영화는 현장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사건이 일어난 시간보다 좀 더 머물러 그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폭탄이 터진 이후 뜨거움에 데인 가족들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그 폭탄으로 인해 여기저기 흩어진 차가운 파편들을 들추며 흉터의 흔적을 하나 둘 이어간다.
![]()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스틸컷 | ||
“슬픔이란 감정은 각자의 경험과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고 말했던 트리에 감독은 이같은 생각을 강조하는 시퀀스와 이미지들로 영화를 채웠다. 각 인물의 시점을 오가는 복합적인 구성과 콘래드(데빈 드루이드)의 경우, 회상과 꿈이 어우러지면서 엉키는 장면들까지 연출된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신파와 뻔한 화해의 드라마가 그려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각자의 걸음 속에서 서로와 더 멀어지거나 쉽사리 가까워진다.
![]()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스틸컷 | ||
여기서 필자가 유심히 본 장면은 세 장면이다. 첫 번째로 꼽는 장면은 다들 공감하겠지만,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마법과 같은 상상력들이 일상과 엮여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콘래드의 글을 읽는 순간이다. 트리에 감독의 연출력은 여태까지 의문에만 휩싸이고, 공감의 여지를 내주지 않던 캐릭터를 이 한 장면만으로 단번에 이해시켰다. 관객은 물론 가족의 일원인 형 조나(제시 아이젠버그)와의 소통의 통로를 또 한 번 제공한다. 이 장면 속 글귀들은 다각적인 이미지들로 훅 다가오면서 어느 순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글로 써내려가는 아들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케 한다.
![]()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스틸컷 | ||
두 번째로 꼽은 장면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과 타인과의 관계를 설명했던 장면들이다. 사실 이 부분은 한 장면만으로 설명하기 아쉽다. 단순 외도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까운 사이가 오히려 더 멀게 느껴져 사실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한 조나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이 나오지는 않는다. 함께 가정을 꾸린 가족임에도 “가끔 그녀가 날 떠날 거란 확신이 들어.” 라는 말로 아내를 표현했던 조나였다.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존재나, 거리감이 있는 타인과의 대화가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이 예외적인 케이스가 아님을 아버지(가브리엘 번)와 콘래드의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 그리고 동료였던 이사벨과 리처드(데이빗 스트라탄)의 외도를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이사벨의 말처럼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집이었고, 집에 돌아오면 행복을 찾는 듯 했다.
![]()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스틸컷 | ||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는 사람이 된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 나를 원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필요한 것 같진 않다.”
이사벨의 독백 속에 그녀가 느꼈을 일상의 괴리감이 깊이 묻어난다. 중요한 자리,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절실한 필요의 자리에 있다가, 문득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에겐 모든 것들이 다시 적응해나가야 할 과제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 없이 훌쩍 자라가는 아이들과, 곧잘 생활하는 남편을 보며 갈수록 외로움이 커졌을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겠지만, 외로움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가끔은 관계로 인해 극복되는 외로움이 아닌, 혼자만의 외로움이 증폭되어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이해’라는 선을 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 |
||
| ▲ 영화 <라우더 댄 밤즈> 스틸컷 | ||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이 기괴하면서도 가장 크게 와 닿는 것이다. 어떤 마음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만이 이해인 것은 아니다. 카메라라는 시선에 투과된 이미지들로 느끼는 감정이 ‘이해’일 수도 있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괴리를 직시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섣불리 드라마틱한 화해를 통해 이해를 부추기지 않는다. 콘래드의 상상 속 등장한 이사벨이 데려온 조나의 아기를 통해 화해가 드러난다. 아기라고 했지만, 실상 삐쩍 마른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한 ‘그 무엇’은 이사벨의 손을 잡고, 그녀의 회고전 자리에 들어선다.
영화의 시작에서도 보여졌듯이 삶과 죽음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교차하고 있다. 회고전의 자리에서 그들은 삶에 대해 말할 것이고, 삶을 살아가는 가족들은 삶보다는 죽음의 얼굴에 가까웠던 아기가 보내던 미소를 기억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 공존했던 모든 것은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이해와 위로가 된다. 설명은 필요없다, 그들이 함께 웃으며 ‘가족’으로 있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