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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널>, 2016, 김성훈 감독 / 하정우, 배두나, 오달수, 남지현 | ||
*해당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 “각자도생(各自圖生)”. ‘사람은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스스로 도모한다’는 뜻의 한자성어다. 그런데 혼란스러웠던 조선 후기 왕조실록에도 네 번이나 등장한다는 이 표현이, 고사성어의 모태인 중국 고전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유래가 없다고 한다. 즉, ‘각자도생’이라는 말은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과 잇따른 기근, 부패한 관료들의 수탈로 고통 받던 당시 조선인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렇듯 조선 말 ‘민초(民草)’들의 참상을 대변하는 데 쓰였던 관용구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다시 나타났다. 취업난, 물가대란, 주택대란 등등 실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허리띠와 목을 조여 오는 경제, 거기다 만성적인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들까지. 어딘가 묘하게 전근대의 시대상과 오버랩 되는 듯한 건 기분 탓일까. ‘잘’ 사는 것까지야 욕심이라 쳐도, 요즈음 우리네 현실은 어째 ‘사람답게’ 사는 것 마저 쉽지 않다. ‘금수저’와 ‘은수저’, ‘흙수저’로 스스로를 등급 매겨가며 ‘헬조선’에 분개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그냥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各自圖生)’는 체념의 정서로 진입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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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영화 | ||
<터널>은 그러한 요즈음의 세태를 솜씨 좋게 비추는 풍자극이다. 그러나 일각에서 이 영화에 붙이는 ‘정치적’이라는 꼬리표에 100% 동의할 수 없는 건, 감독이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 때문이다. <터널>의 시선이 흐르는 방향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즉, 상승하는 영화가 아니라, 가로로 확장되는 영화다. 마치 매몰된 ‘정수(하정우)’가 자신의 찌부러진 차로부터 환풍기를 통해 탱이와 미나를 만나고, 이후 점차 굴을 파듯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것처럼. 적어도 ‘특정한 타깃’을 겨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라는 뜻이다.(게다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모두가 언급하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출판됐다.) 감독은 특정한 악인을 앞세워 일종의 대결구도를 만드는 대신에, ‘정수’와 터널 주위로 점점 복잡하게 둘러쳐지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들과 인물상을 보여준다. 일주일이면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던 ‘정수’를 한 달 이상 붕괴된 터널 속에 가둬둔 것은 단 하나의 인물, 단 하나의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번에도, 그깟 도롱뇽 몇 마리 출현한 것 때문에 공사 중단되느라 국가 경제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왔는지 아십니까?”
“지금 저기 터널 밑에 계신 분은, 파충류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사람.”
제 2 하도터널 공사재개를 위해 열린 주민공청회에서 하도터널 건설을 맡은 건설사 팀장과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의 대사다. ‘정수’를 마치 한 마리 도롱뇽에 비유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하는 팀장에게 ‘대경’은 터널 밑에 갇혀있는 것이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임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잘못된 설계도로 굴착작업이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구조기간이 늘어나면서 공사가 중단된 2 터널 투자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설상가상 ‘정수’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버린 것이 그러한 목소리들에 힘을 실어주게 된 것이다. ‘이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계속 이러한 경제적 손실을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 이 말을 조금 거칠게 번역하면 ‘어차피 곧 죽을 텐데, 며칠이면 시체 될 사람 건지려고 우리가 그 생돈 날려가며 기다려야합니까?’쯤이 되니, 생명 살리는 것을 업으로 삼는 ‘대경’에게는 팀장의 ‘도롱뇽’발언이 일종의 위험신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흡사 목숨값을 흥정하는 듯한 위화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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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영화 | ||
경제논리가 생명윤리를 앞서려면 언제나 그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다. 투자자들의 금전적 손실을 멈추기 위해 서둘러 발파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건설사의 주장은 구조현장 작업반장의 죽음, 그리고 ‘65%’라는 구체적 수치의 이른바 ‘국민적 피로도’에 힘입어 현실화된다. 터널이 무너지고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이 제 2 터널 공사재개 동의서에 서명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고작해야 한 달. 정확히는 ‘정수’의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진 시점부터 약 2주 만이다. ‘터널 밑에 갇힌 것은 사람’이라던 대경의 외침이 무색하게, 정수는 도롱뇽이 된 것이다. 언뜻 ‘돈 많고 힘 센’자들의 입김에 밀려 평범한 세일즈맨이 희생양이 되는 듯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오히려 ‘사건의 실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요컨대, 정수가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먹은 것은 비단 위에 있는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마차가지라는 것을. <터널>을 ‘수직이 아닌 가로로 확장되는 영화’라고 평하는 이유다.
엉뚱한 설계도가 증명하듯―부실공사로 인한 사고 후에도 책임보다 이윤추구에 급급한 건설사, 제대로 갖춰진 체계도 없이 각 부처와 기관들이 보고하는 브리핑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안전처, 특종을 위해 최소한의 보도윤리 마저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언론, 낙후되고 열악한 장비 환경에서 주먹구구식으로 구조작업을 진행해야했던 소방구조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장 빨리―당사자인 가족보다도 더―피로감을 느낀 “65%의” 국민. ‘세일즈맨 이정수’ 매몰 사건은 이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빚어낸 합작품이다. 인내심 없는 사회의 ‘그만하자’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정수는 조금 더 일찍 터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매몰 된지 35일 만에 구조되자 세상은 떠들썩하게 그를 반긴다. 마치 단 한 번도 정수의 생존사실을 의심한 적 없었다는 듯이.―장관의 표현을 빌자면―‘지구보다 무거운 한 생명의 무게’를 지키기 위해 온 사회가 최선을 다했다는 듯이. 그러나 정말 최선을 다했을까? 과연 세상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무사생환을 바라고 기대한 걸까? (피로하다던 65%의 국민은 그새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사실 그를 건진 것은 안전처도, 매스컴도, 성난 여론도 아닌 구조대장 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다 꺼져 이 XXX들아!” 뉴스에서는 편집되었겠지만, 대경의 입을 통해 정수가 뱉은 저 한 마디면 다 설명이 되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 처가에 가기 위해 국도를 탄 정수와 세현(배두나)은 다시―새로운―터널을 마주한다. 차유리 위로 지나쳐가는 환풍기 개수를 세다보니 자연스레 영화의 도입부, 거대한 균열과 함께 무너지던 터널의 천장이 오버랩 되는 듯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두 손을 꼭 잡고 무사히 터널을 통과한 부부는 서로를 보며 애써 웃는다. 그런데, 터널을 통과한 이들이 탄 자동차는 아찔한 높이의 교각 위를 달리고 있다. 달리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서서히 줌아웃 되며 보이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 어쩌면 도롱뇽이 한 마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정수를 가둬뒀던 터널은 하나의 은유에 불과하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거대한 터널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스친다. 지나친 비약인걸까. ‘나도 내 영화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으면 좋겠다’ 던 감독의 인터뷰처럼, 나 역시 내가 도롱뇽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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