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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회색, 영화 <밀정>

민소영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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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정> 단체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민소영]*관람에 영향을 미치진 않으나 약간의 스포가 있으니, 관람 후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김지운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네 번째 만남, 18년 지기 우정 사이에서 나온 영화 <밀정>은 깔끔하고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가슴 뜨거운 작품이었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에게 ‘김지운’, ‘송강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반칙왕>일 것이다. 스포츠 관련 영화가 많지 않았던 당대에 비인기종목으로 전락한 ‘레슬링’을 들고 나온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무라 여겨지는 것들을 쫓아 꿈을 잊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통쾌함을 선사했다. 그 기회로 ‘김지운’이라는 감독 특유의 재치와 ‘송강호’라는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를 알게 된 것은 한국 관객으로서 뜻깊은 순간이었다.

   
▲  영화 <밀정> 촬영현장

 최근 시대적 아픔을 드러내는 실존 인물들을 연기함으로써 더욱 사랑 받게 된 배우 송강호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다룰 줄 아는 김지운 감독의 연출을 통해, ‘황옥경부폭탄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 속 인물 ‘이정출’로 돌아왔다.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 역)은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으로 의열단원 김우진(공유 역)에게 접근하고, 서로 정체와 의도를 알면서도 속내를 감춘 채 가까워진다.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역)이 상해에 도착했단 소식에 의열단원들과 일본경찰들이 한 곳에 모이면서 영화는 전환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내면에 흔들림이 존재하는 이정출을 내세움으로, 그가 변화한다는 카타르시스는 약할지 모르겠으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깊은 공감을 내세운다. 그 시대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신념 하나만으로는 무너지기 부지기수이던 대격변의 시대를 한 인물로 응축시킨 것이다.

   
▲  의열단원 김우진(공유)

 물론 그 인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주변인물들 또한 빠질 수 없다. 의열단원인 공유, 한지민, 그리고 특별출연한 이병헌은 뚜렷한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가를 연기하는 만큼 생생한 눈빛과 절제된 말투를 통해 강인함을 드러낸다. 영화 <부산행>으로 천만관객 타이틀을 얻게 된 공유와 여러 차례 시대극에 얼굴을 비춰온 한지민이지만, 이 영화에서의 연기만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기에 관객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최근 헐리웃에서도 사랑받는 배우 이병헌은 특별출연임에도 묵직한 연기를 통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정출을 의심하며 바짝 조여오는 일본경찰 하시모토를 연기한 엄태구 또한 충무로의 떠오르는 유망주의 몫을 제대로 보여준다.

   
▲  변장한 김우진(공유)와 그 옆에서 대화하는 일본경찰 하시모토(엄태구)와 이정출(송강호)

 각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이정출의 갈등을 완벽히 빚어낸다. 주변인물들에 의해 반복되는 고뇌 속에서 이정출이 따라간 것은 자신의 안위이기도 했고, 마음의 빚이기도 했다. 이 것이 가장 적절히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기차씬이다. 역사라는 선로 위 열차가 달리는 방향을 따라가기도 거슬러가기도 하면서 김우진과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상반된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경성으로 폭탄을 옮기는 것만 도와달라 부탁하는 김우진은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며 직진하는 인물이다. 동선조차 거침없는 그에 반해, 이정출은 그의 부탁에 애매한 반응을 보이며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 말한다.

 갈팡질팡하던 그가 어느 기점에서 결단한 듯 보이는 장면이 있다. 의열단 내부의 첩자를 발견한 직후, 이를 전달하고자 일본경찰들을 뒤로 한 채 김우진을 찾아 나설 때다. 관객들에게 이 장면은 뜬금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짧고 갑작스럽게 표현된 그의 발걸음은 좁은 기차 통로를 빠르게 움직이는 듯 하나, 시간이 그를 붙잡듯 늘어지는 노출 기법을 이용함으로 격동하는 그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  경성역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연계순(한지민)

 그렇기에 이정출의 변화는 일순간의 애국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켜켜이 쌓임으로 발생한다. 감정적이기보다 담담하고 근엄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과정은 마치 안개처럼, 깊이와 농도가 가늠되지 않게 하나둘 겹쳐 회색을 만든다. 부조화들이 주는 조화와 올드하다고 느낄 정도로 익숙한 기법에 가해진 약간의 변주로 영화 특유의 회색은 더욱 빛을 발한다. 필자는 간만에 보는 디졸브 편집이 그렇게도 인상적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듯 화면끼리 서로 스며드는 모습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밀정’의 경계 모호함과 일맥상통한다. 의열단원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이정출의 내면적 고통이 극대화되던 장면들 속 흐르던 루이 암스트롱의 블루스 ‘When You’re Smiling’는 반어적인 등장으로, 시각적 이미지와의 부조화를 통해 음향연출의 세련된 멋을 더했다.

   
▲  영화 <밀정> 촬영현장

 <밀정>은 콜드느와르의 싸늘하고 쫄깃한 분위기를 선사하다가도 재치 있게 웃음을 유도하지만, 진중한 핵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자칫하면 엉뚱한 흐름이 될 수 있는 경계선을 아찔하게, 감각적으로 넘나들며 예상치 못한 부조화들을 통해 ‘절제’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감정몰입이 넘치지 않게 만들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가는 순간 되려 응어리가 남아 가슴이 막힌 듯한 먹먹함을 유지하게 한다. 우리는 시대극들이 ‘신파’라는 부정적인 타이틀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같은 시대극인 <밀정>이지만, 감정과 애국을 호소하기에 앞서 이 영화는 그 시대와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인간적인 면모들을 앞세웠다. ‘마땅히 해야할 소명’에 대해 말하며, 연속되는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들을 딛고 일어나 다시 실패하는 것의 의의를 제시한다.

 “당신은 이 나라에 독립이 올 것 같소?” 라는 의문에 의구심을 던지는 것이 아닌 노력과 염원을 폭탄에 실어 던지던 그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역사를 담담히 전한다. 이 영화는 배우 송강호가 말한 것처럼,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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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소영 기자
mandy7547@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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