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황희지] 오를랑의 작업은 ‘몸’과 ‘정체성’을 주제로 한다. 오를랑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상실된 여성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자신의 몸을 사용해 고전적 개념들로부터 완전히 탈피한다. 하지만 오를랑의 작업은 ‘여성’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남성이 지배자이기에 형성된 이데올로기로부터 탈피하고, 억압으로부터 독립하여 주체적인 삶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궁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를랑은 ‘남성의 기준을 붕괴시킨 여성’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를랑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조롱하는 오를랑’ 인 것이다.
흔히들 알고 있지만 오를랑의 몸은 기괴하다. 우리, 그리고 사회가 강제적으로 부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기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상대적인 개념의 ‘추’인 것이다. 그리고 오를랑의 작업이 주는 불쾌함(어디까지나 상대적인)이야말로 낡은 사회로부터 정립된 정체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가장 큰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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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마에 두개의 혹을 붙인 오를랑, 출처=http://www.institutfrancais.es | ||
기준에 적응하고, 잘 훈련된 사람들보다도 가장 큰 불쾌를 느낄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기존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사회적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운 권력자(백인 혹은 남성)일 것이다. 항상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지던 사회적 결정체에 금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 끔찍한 불쾌와 동시에 자신의 위치가 침해당하는 모욕까지 느낄 것이다. 순종적인 객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 여성은 더 이상 없다. 시각적 쾌를 선사하던 존재이자 아름다운 성녀로 찬양받아야 할 존재가, 지나친 폭력과 과격함으로 무장한 채 자신에게 덤비는 것이다.
오를랑은 여성으로서, 객체로서 보여지는 몸에 대해 과격하게 저항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듯 추하고, 불쾌한 모습으로 성형 수술하는 작업은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재단될 수 없는 스스로의 ‘몸’임을 증명한다. 지금껏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서구의 시각 매커니즘에 의해 규정된 성의 위계체계, 즉 ‘보는 남성’과 ‘보여지는 여성’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스스로 ‘보여주는 오를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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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형수술 중 인터뷰 하는 오를랑, 출처=http://www.creative-mapping.com | ||
의식이 있는 수술 상태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오를랑은 온전하게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상태이며, 오를랑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가하는 물리적 시술, 수술은 객체에게 부과되던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이마에 두 개의 혹을 이식하는 극단적인 성형수술 끝에 오를랑은 여성의 기준 뿐만 아니라, 남성, 모든 인간에게 부여되는 기준을 붕괴시킨다.
바로 이 지점이 오를랑의 철학이자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지배자 남성과 피지배자 여성의 구도로 시작했을지언정, 오를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약자를 억압하는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이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칼럼을 쓰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오를랑과 오를랑의 작품을 다루면서 ‘그녀’ 혹은 ‘그’와 같은 성(sex, gender)적 대명사는 쓰지 않겠다고. 글을 쓰고, 읽는 동안에도 매끄럽지 않음을 느꼈지만 오를랑을 ‘그녀’, ‘그’와 같은 한정적인 대명사로 정립하고 싶지 않았다.
오를랑은 자기 스스로 여성형도, 남성형도 아닌 ‘오를랑-ORLAN’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했다. 자신을 무성(無性)의 집단에 종속시켰지만 이는 단순히 ‘성이 없다’(sexless, genderless)는 의미와는 다르다. 성(sex, gender)이라는 이름하에 가해지는 힘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오를랑’이라는 주체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일종의 독립인 것이다. 일방적으로 여성임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 인간이자, 작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오를랑에게 보내는 나의 작은 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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