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인간답기 위하여, 당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조건”
양효주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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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양효주] ‘인간’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라는 소리를 들으면 분명 모욕적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인간아~ 인간아~” 라고 불러줘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일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명제를 어떻게 풀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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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z TV – Joseph Beuys | ||
문득, 몇 해 전 소설가 K의 “밥벌이를 하지 않는 자는 인간성을 논할 자격이 없다”라는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작가가 노동을 숭고한 가치로 여기고 노동에 힘겨운 이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한 말이려니 하고 넘겼으나 나는 여전히 노동과 인간성을 등의 상관관계로 보는 것이 불편하다. 노동이 언제부터 인간성의 척도가 되었는가? 노동은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데 주어진 기본 조건들에 상응하며 생을 이어가기 위한 인간의 근본 활동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동물이 굶주린 배를 채우고 생식 활동을 하며 종족을 번성시키듯 오직 생존을 위한 필연성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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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lker Evans Train Station Paducah KY 1947 | ||
그런데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과 20세기 미국의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 오며 사회는 노동을 근대적 인간의 삶의 목표와 목적으로 둔갑시켰다. 또한 사회는 늘어난 수요를 맞추기 위해 대량 생산이 필요해짐에 따라 노동을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조장하고 생산력이 높은 노동자를 우월한 인간이라고 치켜세웠다. 그 결과 과거의 노예들이 노동과 주인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갈망한 것에 반해 오늘날의 인간은 보다 “인간답기 위한” 명목으로 사회가 만든 정치적·경제적 먹이사슬 시스템에 노예가 되고, 혹은 개인의 탐욕에 예속되어 노동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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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dern times 1936 | ||
그런데 급격히 가속화되는 자동화의 물결 속에서 머지않아 노동이 없는 사회가 도래할 터인데, 그때는 노동과 인간성의 방정식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각종 기술과 요건을 갖춘 (노동) 능력을 인정받은 생산적인 노동자가 비생산적인 자유인 앞에서 느끼는 우월감은 인간보다 빠른 속도와 방대한 자료 그리고 정확도를 갖춘 슈퍼컴퓨터 앞에 속절없이 무너질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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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dern times 1936 | ||
그러므로 인간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활동이 다른 종(동물, 기계 등)들의 노동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탁월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활동에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먹잇감을 위하여 사냥을 하는 동물과, 명령에 순응하는 반복적인 기계의 노동과는 분명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 실존의 조건을 생물학적 삶 자체인 탄생성과 사멸성, 세계성, 다원성, 지구라고 주지하면서 이러한 조건과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근본 활동으로 노동, 작업, 행위를 제시하였다. 아렌트는 그중에서도 “행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행위를 통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탁월성을 증명할 수 있다. 행위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구분하여 실현될 수 있는데, 공적 영역의 대표적 예시로 아렌트는 그리스의 폴리스를 꼽았다. 폴리스는 경제적으로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시민이 공안에 대해 토의하고 서로의 주장을 듣고 나누며 정치적 인간으로서 사회적 행위를 행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좀 더 특별하다. 아렌트는 개인의 위대한 업적이 개인이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역사의 흔적으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되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는 곧 인간의 사적인 행위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탄생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거슬러 불멸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다.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존재 증명을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언어와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과제와 잠재성을 산출한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하고 명예로운 행업을 통해 자신을 영구히 보존시킬 수 있다. 이러한 불멸성을 위한 삶의 활동은 인간만의 본성이자 특성이다. 오로지 종의 생식 보존으로 불멸성을 구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멸하기 위한 인간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는데 소위 입신양명, 출세를 해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다 죽으면 불멸하는 것일까? 필자의 사견으로는 창의적인 삶이 불멸에 이르는 삶이다. 개인의 창의성은 비단 자기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무수한 창작의 영감을 제공한다. 예컨대 논문이나 책을 쓰다 보면 내 주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선대 학자들의 글을 찾아본다. 그들의 생각을 읽고 내 주장을 검토하면서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한다. 선대 학자의 생전의 연구가 사후에도 세대를 거치며 무한히 인용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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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natomy Lesson of Doctor Willem van der Meer in Delft | ||
예술가의 작품 활동은 어떠한가. 나는 여기서 예술가의 예술 활동이 생업의 일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도 먹고살려고 붓을 든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의 활동은 분명 생존과 명예를 뛰어넘는 보다 숭고한 것을 산출한다. 예컨대 작품 속에서 읽히는 예술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당대의 정치적 군상들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술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하여 당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와 미학을 판가름한다. 그뿐이랴 예술가가 사용한 재료를 연구하여 당대의 과학 기술, 경제수준, 외교관계를 가늠할 수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의 차림새에서 유행 패션까지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의학, 정신분석학, 법 연구의 실례로도 유용하다. 이처럼 예술가의 예술 활동은 예술과 직접적 상관이 없어 보이는 분야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연구의 방향과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술이 품은 잠재성은 실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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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Tissot Portrait of the Vicomtesse de Montmorand 1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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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Tissot’s “Portrait of the Marquise de Miramon,1866 | ||
그런데 예술적 행위라는 것이 그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20세기 최고의 현대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예술가 요셉 보이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삶이 곧 예술이다.” 그러니 생각하라.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다루고 좋아하는 매체로 그 생각을 표현하라. 그러면 당신의 삶도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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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seph Beuys | ||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볼 수 있겠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 내가 진정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행위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당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라.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영원에 이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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