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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Up)>, 2009, 피트 닥터 감독 / 월트 디즈니, 픽사 스튜디오 | ||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사랑이 삶을 어디까지 특별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이 이성 간의 것이든 동성 간의 것이든,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묶는 과정은 실로 아름답다. 뺨을 스치는 바람처럼 숱하게 나를 지나치던 인연 중에, 기적처럼 그와 내가 동시에 붙잡은 ‘우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나와 그가 서있던 그 곳은 더 이상 평범해질 수 없다.
버스 정류장, 집 앞 편의점, 도서관, 출퇴근길. 그곳이 어디든, 일상 속 모든 장소와 시간이 ‘그 사람’으로 물든다. 진부했던 나의 삶이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변한다. ‘나’라는 사람 또한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사람이 된다. 연애가 진행될수록 ‘그’가 곧 ‘나’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을 맞이할 때 잃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그 사람’을 잃으면, 그와 함께 하던 ‘일상’도 잃는다. 사랑이 사람을 세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이기도 하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일상을 잃어버린 삶은 흡사 죽음과 같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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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위와 같은 맥락에서, 상냥한 로맨티스트였던 칼의 삶이 앨리의 죽음 이후 가파르게 추락곡선을 탄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죽음은 ‘일상’을 넘어선 ‘삶’의 절반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 그에게 아내와 수십 년간 살았던 집은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각종 액자들과 앨범, 장식품의 위치와 가구들의 배치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앨리의 생전과 똑같은 질서 속에 정돈된 집의 구조만 보더라도, 그의 집은 단순한 거처나 재산 정도의 의미라기보다 일종의 ‘추모 공간’, 혹은 ‘박물관’ 따위에 가깝다. 즉 영화 속 칼의 집은 ‘앨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마치 앨리를 사랑하듯, ‘집’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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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그리고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극장에 들어간 우리는 그런 칼의 사랑을 ‘이해한다’. 또한 그의 ‘집’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건축물로서의 ‘집(house)’만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인지한다. 그래서 거대한 풍선 꾸러미가 칼의 집을 들어 올릴 때, ‘어른인 나’가 내뱉는 감탄사는 아이들의 그것과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탄사가 절반, 나머지 절반은 가슴 한 쪽 깊이에서부터 차오르는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풍선은 집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벗어난 ‘어른’의 사고가 가능해야만 느낄 수 있는 슬픔 말이다. 이는 아이들이 색색의 커다란 풍선꾸러미에 놀라 시선을 빼앗길 때, ‘어른’인 나는 그 풍선의 개수를 헤아리며 곰곰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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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사랑은 그대로인데 그것이 향하던 사람은 세상에 없고, 이제 그 사랑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나 역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인간의 속도로 늙어가는 ‘나’와, 나보다는 훨씬 더딘 속도로 늙어가는 ‘집’. 야속하게 모든 것을 앗아가는 세월 속에서 집은 ‘앨리와 함께한 칼’을 증명해주는 마지막 증인인 셈이다. 그런데, 내게 이런 의미를 주는 집으로부터 하룻밤 새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면? 이 이야기를 현실세계에 적용시킬 경우 이후의 엔딩은 뻔하다.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노인 ‘칼 프레드릭슨’은 날이 밝는 대로 강제퇴거와 동시에 요양원으로 인계되었을 것이고, 주인이 사라진 집은 수일 안에 헐려 고가 빌딩숲의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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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상황이 이러함을 알기에, 풍선에 실려 날아가는 집은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뭉클한 서글픔을 준다. 경제적인 능력도, 예전과 같은 젊음도 없는 칼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남은 아내의 마지막 흔적을 지키기 위해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 그것은 청원을 내는 것도, 건설사 사장에게 사정을 하는 것도 아닌, 모두가 잊어버린 미지의 세계로 집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 평생을 풍선 장수로 살았던 그는 그 날 밤 자신이 평생 팔았을 개수만큼의 풍선들을 부풀리며 어떤 마음을 불어넣었을까? 노랑, 파랑, 분홍, 초록…. 알알마다 각기 다른 색으로 부풀려진 칼의 간절함을 세다보면, 비록 ‘순수함을 잃어버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그의 모험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가슴속 깊이에서 차오르는, 바로 저렇게까지 지키고 싶었던(혹은 지키고 싶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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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물론 <업(UP)>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들은 풍선이 들어 올린 집 “밖에” 포진해 있다. 줄곧 보청기와 지팡이에만 의존하며 생활했던 칼의 신체적 능력이 모험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젊어진다거나, 오랜 우상이었던 ‘찰스 몬츠’와 대적하면서 새로 사귄 “친구들”―‘러셀’, ‘케빈’, ‘더그’―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과정, 납치된 ‘케빈’과 ‘러셀’을 구하러 가기 위해 애지중지했던 집안의 모든 가구와 장식품(앨리의 사진까지!)들을 망설임 없이 내던지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텅 빈 집까지 ‘파라다이스 폭포’ 위에 남겨둔 채 새로운 친구들과 비행선을 타고 돌아오는 장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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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영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액션 어드벤처’라고 정의하는 만큼 이 일련의 과정들이 관객에게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요컨대, 아내와의 사별 후에도 사랑을 지키고 싶어 집을 띄운 ‘칼’의 순애보보다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두게 했던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람들과 더 넓은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 그러니까, 앨리의 모험책 마지막장에 적혀있던 ‘당신만의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라는 그 한 문장이 영화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는 셈이다.
모험의 끝에는 ‘완전히 새로운 것’, ‘무언가 귀중한 것’의 발견이 있고,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었건 우리는 보물을 품에 안은 채 다시 집으로(일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칼은 미지의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파라다이스 폭포’를 찾았고, 그곳에서 그녀(집)와도 영원히 작별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대책 없이 떠난 모험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아내의 꿈이었지만, 파라다이스에서 발견한 진짜 보물은 가족, 그리고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삶의 반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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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업(Up)> ©네이버 | ||
‘찰스 몬츠’와 ‘파라다이스 폭포’위에서 시작된 칼과 앨리의 사랑은 마침내 그들의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길고 긴 세월을 돌아 파라다이스 폭포위에 놓인, 두 사람의 집. 이것은 ‘엔딩’보다 ‘완성’이라고 불려야 맞지 않을까.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노인이 집 한 채를 거뜬히 이고 달리게 만든 힘. 이 말도 안되는 동화를 ‘완성’시킨 기적의 이름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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