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use closer, clearer, no sir, nearer, 영화 <디스트릭트 9>
김범진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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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디아티스트매거진=김범진] 많은 SF영화에서 외계인은 스토리에 생경스러움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한다. E.T. 같은 영화가 아니고서야 그 생경스러움은 대체로 공포로 번역되고, 고향 지구를 지키는 수많은 스토리라인을 공유한다. ‘디스트릭트9’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이 영화를 가장 인상깊은 외계인 영화 중 하나로 격상시키는데, 극 중 외계인은 미지의 존재이고 동시에 일종의 관리 대상이다. 격리되어 관리되며 인간과 섞일 수 없는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외계인에게 영화는 이전의 다른 영화들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감정이입을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그렇게 외계인들에게 성격을 입히고, 마치 인간성과 유사한 고유한 개체의 개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당 작업이 시작된다. 사실 여기서의 외계인은 외모와 생활 양식 몇 가지만 극단적으로 다를 뿐이지 그 속성에서의 차이의 정도를 무시하면 실질적으로 인간과 크게 다른 속성이 없다. 인간이 가지는, 보통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면 으레 가진다고 공감되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이들 외계인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갖추고 있는데, 그래서 여기서의 ‘외계인’이라는 프레임은 영화 속 주류 인간사회의 구성원들과 차이를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영상미와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차별이 되는’모습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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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실질적으로 외계인들의 탈출이나 외계인들의 지구 정착기 등은 재미 요소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할지는 몰라도 의미적인 골격에서는 사건에 불과하다. 가장 힘이 실린 장면은 말미에서 주인공인 비커스(샬토 코플리 분)가 명백한 외계인이 되어 진짜 외계인의 탈출을 돕는 부분이다. 관리 주체가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보통 해당 인물이 택할 수 있는 결정은 많지가 않을 텐데, 비커스는 그 중에서 어쨌든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관리 대상과의 동질화를 택하였고, 기 존재하는 관리 주체에게 관리받는 길을 강제적으로 택한다. 그가 온전한 인간이었을 때에도 관리 대상에 대해 약간의 연민을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그와 관계없이 현재의 비커스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데에 성공하고 그 성공의 과정과 원인에는 그의 외계인화가 있다. 비커스가 외계인이 되어 비행체를 가동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본다면 가망 없는 본인의 미래에 대해 한 가지 희망, 믿음이라는 가장 불확실하고 강력한 담보를 잡은 희망을 현실로 끌어내려와 실현하는 행위의 시발점이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외적인 사건을 떠나 바라보면 비커스가 외계인이라는 관리 대상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동시에 그만큼의 연민을 느껴가면서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측정치가 상승하는 만큼이 그가 외계인화 되어가는 정도의 측정치와 단위만 다를 뿐 같은 현상에 대한 측정의 결과이다.
정리해보면 이 영화는 관리 주체와 관리 대상으로 대별되는 차이에 의한 차별의 정당성이 부정되어가는 과정의 시작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정의 최종적인 결과로 이르는 길에는 무수히 많은 경로가 존재하겠으나 여기에서는 적어도 그 방향을 상대방에 대한 동질감, 그리고 나와 동등할 대상이 차별을 받는다는 현상에 대한 부당함과 그에 의한 연민에서 시작하게 한다. 동일한 집단에서의 어떠한 정당함도 없는 차별이 위험한 이유는 그와 동일한 이유로 차별의 네임태그만 바뀌어서 해당 혐오의 결과가 자신이 가지는 집단과의 차이에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인데, 차별을 하는 쪽은 언제나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가는 셈이다. 외계인은 두려움의 대상이긴 하다. 그들은 지구상 존재하는, 인간이 몰랐거나 몰랐을 어떤 존재들보다 갑작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며 그래서 주류인 인간사회는 그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두려움에서 시작했을 격리와 관리는 2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양상으로 분열되고 변형되었을 것이고 그에 더해 인간에게 있어서 외계인이라는 강력한 이질성은 인간 사회를 지배했을 제약과 규칙들이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가정의 사고가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만큼이나 처음 시작이었던 두려움을 껴안고 다양한 폭력으로 표현되어 왔다. 외계인은 절대다수에 대한 압도적 소수였으며, 외계인 입장에서는 불시착에 대한 환대를 기대하였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적대적인 집단을 마주한 현재, 무기력하게 그런 차별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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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영화 외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였을 때 이 영화가 정확하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겨냥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다. 외계인은 흑인으로 바꾸고 약간의 SF요소만 제거하면 더욱 정확하다. 위에서 한 추정들을 번복하더라도 현재에서는 차별이 매우 명백하다. 위험부담을 굳이 안고 가면서까지 특정 집단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차별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차별의 결과로 얻는다는 이익이 정말로 이익인지도 모르겠다. 외계인과 함께 어울려 살았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생존을 대상으로 하는 두 집단 사이의 관계는 적대와 환대 둘 다를 포함한다. 두 집단 사이의 이질감이 클수록, 그리고 대체로 이질감은 아예 다른 속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같은 속성에서 두 특성이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이질감이 강화되고 이는 쉽게 두려움으로 변이한다. 두려움으로 발현되는 과정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이 두려움을 어떠한 방식으로 관리하는지가 중요하다. 평화는 순진하지 않으며 불화는 영악하지 않기에 지능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집단은 반대로 지능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상대방을 포함하여 판단하고 행동해야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힘의 불균형을 활용한 억압은 비슷한 지성을 가진 집단 간에는 완벽하지 않으며, 비슷하지 않다 해도 다를 바가 없다. 어울려 산다는 말의 분위기는 평온하긴 하나 영화가 나아가는 방향은 평화라기보다는 불화의 비포장도로를 어기적거리며 걸어가서는 우연히 박애를 발견하고 박애의 느리고 완벽한 균형성을 찾아가려는 듯 하다.
사실 그렇게 멀리 돌아가지만도 않았다. 그리고 불시착한 외계인들이라는 완전히 생경스러운 존재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양편 어디에 서있더라도 변명거리는 많다. 수많은 변명들은 그만큼이나 달랐던 외계인과 인간 사이의 이미지의 차이에서 기인하였기 때문인데, 우리는 변명으로 덮을 수 없는 진실을 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드러나는 차별이 두려움이라는 원인을 끼워맞추면 이해가 또 되더라도 도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심정도 마찬가지이다. 비커스처럼 주체와 객체의 전환을 일신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차별의 완벽한 극복은 그에 기반하는 차이의 이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고 알다시피 우리는 외계인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누구도 인간이라는 존재로 시작한 이상 인간의 집합에 포함되는 다른 세부적인 사항들의 차이의 속성들을 차별로 변이시킬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규칙과 이해를 흩뿌려 두고 그 위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스스로가 존중받고자 하는 만큼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이 집단으로 혼화되지 않고 개인으로 존속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해당 집단 구성원들간의 균형에 해소가능한 가역성을 부과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아가 개인이 보다 너른 개인이고자 한다면 타인과의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밝혀가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야만 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명백하게 치환가능한 시점은 오지 않을 것이지만 이상성이라는 것은 특정한 정지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인 증가나 감소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진행은 멈춰서면 안 되며 멈출수도 없다. 추가적으로 해야 할 것들 중에서 하나를 꼽아 보자면 이 진행을 방해하는 소비적인 담론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고 세부적인 논점들을 더해가며 가꾸어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그러한 모든 시도들의 끝이 어디를 향할 지는 아무도 모르겠으나 이는 확률상 당연한 것이고 전적으로 정상적인 미지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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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디스트릭트 9’는 재미있는 영화이다. SF의 재미요소도 충분하고 무엇보다 새롭다. 그리고 이 새로움은 신기하게 생긴 외계인이나 그들의 부락에서보다는 외계인의 이질감을 통해 인간을 비춘다는, 반사를 활용한 시선의 방향전환에서 온다. 1970년대에 모리 마사히로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가설(인간과 로봇이 닮는다고 해서 선형적으로 호감도가 올라가지 않는다)을 여기에서 호감이라는 감정적인 항목을 반영하여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로봇이나 외계인이나 그들에게 우리의 모습이 투영될수록 그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영화를 보면서 외계인에게 느꼈던 동질감과 이질감 모두의 목적어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속성들을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고, 그걸로 ‘디스트릭트 9’을 조망할 이유는 충분하다.
(제목은 Gil Scott-Heron and Jamie xx – running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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