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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우연, 그 사이에 끼인 의지… <500일의 썸머>

신동혁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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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00일의 썸머>(2009, 마크 웹)

이 영화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사랑의 의미는 무얼까?’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 명쾌하게 정리했지만, <500일의 썸머> 속 주인공 연인(?) 톰(조셉 고든 레빗)과 썸머(주이 디샤넬)에게 이 명쾌한 의미 속 ‘어떤 사람’은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상당히 이질적이다.

오프닝 시퀀스. “이건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다”란 내레이션이 서사를 시작한다. 흡사 “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는 동화를 보는 듯한 이 연출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심상, 과거까지 드러내는 영특한 방법이다. 여기서 톰과 썸머가 가진 ‘사랑’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밝혀진다. 완벽한 사랑을 믿는 남자와 사랑은 완전할 수 없다는 여자. 하지만 이내 화면 양옆에 등치되는 두 인물의 어린 모습은 이 상반된 생각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거부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대로 <500일의 썸머>는 여느 로맨스 영화처럼 사랑관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는 290일, 썸머의 “헤어지자”는 말로 끝난 사랑부터 시작한다. 이 말에 돌아오는 톰의 무기력한 메아리는 “그녀를 잊고 싶지 않아”다. 어쩌면 끝난 사랑에 대해 의지를 이어가려는 톰. 이때부터 영화의 서사는 과거와 미래를 교차로 밝히며 운명과 의지를 탐구한다.

과거로 되돌아간 짧은 시퀀스는 ‘썸머 효과’로 명명된 일련의 사건, 이를테면 아이스크림 가게가 매출이 올랐다거나 아파트 가격이 낮아졌다거나 하는 등 썸머로 인해 변화한 것들, 이 억지 감상을 통해 톰은 썸머를 ‘운명’이라 칭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이런 어거지는 시퀀스 마지막에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설레는 시선으로 포장돼 정당성이 부여된다. 어쩌면 모든 우연을 운명으로 포장하는 게 사랑은 아닐까? 이를 역으로 봤을 때 썸머가 외치는 “좋은 친구”란 이 모든 운명을 우연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존재는 아닐까?

   
 

실제로 톰은 썸머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적잖이 노력한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괜스레 말을 붙이고, 그녀가 좋아한다던 Smiths의 노래 볼륨을 이유 없이 키우질 않나, 파티에선 이름 모를 술까지 건넨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한 마디 “주말에 영화 보러 갈래요?” 따위의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는다. 수동적이고 소심한 남성의 전형. 이 결과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썸머의 접근을 불러왔지만, 이상적 접점을 획득하는 데에 실패한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면, 톰의 태도는 일반적인 연애관계에서 여성의 모습과 유사하다. “나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을 테야”라며 여느 연애처럼의 소유-수동의 관계를 거부한 썸머의 태도는 남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그녀가 갈망하는 여성 주도적 연애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남자로 톰은 제격이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에 그녀가 간과한 건, 평등한 연애가 아니라 역 차별적 연애가 불러오는 또 다른 반발이다.

사랑과 연애는 일정한 요구와 합의의 과정을 거치며 공고해진다. 가벼운 만남을 바라는 썸머와 진중한 만남을 바란 톰 사이에선 이 요구가 전적으로 주도적인 썸머를 통해 벌어진다. 일례로 “난 가벼운 만남을 원해”라는 그녀의 발언에 소심한 톰이 “그래”라며 수긍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연애. 이어서 톰이 썸머의 집에 초대받은 109일 째, 그는 나지막한 속마음을 드러낸다. “썸머의 벽이 조금씩 무너진다” 확실히 톰은 시시콜콜 과거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건 그녀의 벽이 무너진 게 아니라, 그가 썸머의 벽 안으로 발을 디딘 형상이다. 그 밤 후 친구들은 그에게 “그래서 지금 네들 관계는 뭐야?”라며 묻는다. 톰은 “거기에 굳이 이름표를 붙일 필요는 없다”고 외치지만, 그의 마음속엔 조금씩 소유욕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썸머의 마음에 ‘톰’이란 이름표를 확실히 붙이고 싶은 게다.

애정과 소유, 관계에 대한 의문이 차곡히 쌓인 259일 째. 어느 바에서 썸머는 말한다. “나 발목에 이만큼 커다란 나비문신을 하고 싶어” 여기에 되돌아온 톰의 말은 “안 돼”라는 완강한 반대. 이는 썸머에 대한 톰의 소유권 주장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썸머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접근하는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며 마치 ‘내 것’인 양 썸머를 대한다. 이에 그녀는 “볼 품 없이 행동한다”며 일갈하고, 이에 톰은 “우린 커플이지 않냐”며 분노한다. 곧 이어 제 발로 그녀의 집을 뛰쳐나가는 톰. 마치 “난 네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 그 뒤 둘은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 ‘사랑’의 사전적 의미 속, 애정의 대상이 되는 어떤 사람은 과연 상대방일까 나 자신일까? 확신할 순 없지만, 다만 느껴지는 건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연애는 불완전한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썸머와 톰의 괴리는 가만히 살펴보면 남-녀만 뒤바뀌었을 뿐이지 일상적 연애와 이별의 과정을 고스란히 따른다. 소유의 주도권을 두고 펼쳐지는 기싸움. 서로의 바람은 다른 방향을 향했고, 둘의 감각을 오롯이 평행을 그린다. 어떤 접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인접해서 감각의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회사 동료 밀리의 결혼식으로 향하는 기차 안, 우연히 만난 같은 톰과 썸머는 노을 만치 빛나는 미소를 서로에게 지어 보인다. 같은 공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프레임에 존재하진 않는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지치게 계속됐던 둘의 여정은 곧 완전히 끝난다.

완전히 끝나버린 사랑, 둘의 감정은 이전 사랑의 공허를 향한 또 다른 요구를 시도한다. 진지함을 바랐던 톰은 채우지 못한 가벼움을 향하며 연애를 거부하고, 가벼움을 추구했던 썸머는 채우지 못한 영원함을 추구하며 결혼한다.

이 대목에서 톰은 모두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사랑의 의미가 뭐죠?” 언어학자 소쉬르는 “의미는 관계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했던 둘의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500일 간 묵묵히 쌓아왔던 감정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된 톰. 이때 그가 느낀 감정은 무얼까? 분노, 화, 짜증, 배신감 등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를 느껴버린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엔딩 시퀀스. 톰은 내레이션을 통해 ‘운명’이란 것의 무쓸모를 밝힌다. 그리고 면접장 앞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을 바라보며, 과거 썸머와의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려 시도했던 자신의 ‘의지’를 발견한다. 일방향적인 의지는 명백히 아픔만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연 속 여인에게 또 한 번 의지를 발현한다. “끝나고 차 한 잔 할까요?” 이에 돌아오는 메아리는 “약속이 있지만… 좋아요!”하는 또 다른 의지.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의지가 어쩌면 사랑일까? 아직 답을 알 수 없지만, 엔딩 크레딧 후에 그들이 펼칠 스토리는 왠지 기대감을 품게 한다. 아! 여인의 이름이 어텀(Autumn)이라는 건 왠지 우연에만 그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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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혁 기자
ziziyazizi@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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