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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thelittle.org> | ||
[디아티스트=김범진] 주인공은 로다(브릿 말렝 분)과 존(윌리엄 마포터), 둘 또는 넷이다.
멀고도 요원한 길을 걷는다. 로다도 존도 많은 것을 잃었고, 둘 사이를 설명하는 인과관계의 화살표는 방향을 잃는다. 용서로도 해소되지 않을 상실감, 그리고 용서로도 해결되지 않을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시간의 비가역성에 기인한다. 어떤 방법으로도 가운데를 도는 감정의 화살표는 사라지지 않으며, 둘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속적으로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조율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길은 짧지 않으며, 길다고 해도 얼마나 긴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둘은 그 길을 걷는다. 그리고 걷는 것만이 각자의 상처를, 달리 말해 상실감과 죄책감을 보다 나은 자세로 안고 살아가는 것임을 조금씩 알아가려 한다.
다른 지구로 향하려 했던 로다와 다른 지구로 향할 존은 각자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그쪽에 존재하는 자신이 사건 이전에서 사건 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이쪽의 그들은 방관자에 불과하다. 불행은 행복 바로 곁에 있어서, 바로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자신과 다른 자신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와 정확하게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에 다른 지구에서는 그(그녀)는 가장 큰 상실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느끼는 불행과 본인이 바라보는 행복이 서로 상계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은 이 지구와 다른 지구 사이의 거리로 반영된다. 그렇게 로다가 인지하는 다른 지구와의 거리는 존의 그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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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wideanglemovies.com | ||
로다는 존과 함께하면서, 또는 용서를 구하는 그 순간에서부터 멀고도 요원해보이는 다른 지구와의 거리를 좁혀간다. 실질적으로 두 지구는 가까워진다기보다도 각자의 희망을 반영하는데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다른 로다는 다른 지구에서 여기로 향하는 표를 얻어서 왔다기보다는 두 지구가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지구는 로다의 지구였고, 이 지구가 이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였다면 그냥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로다의 또 다른 지구는 그때부터 더 이상 다른 지구가 아니게 되고, 그녀는 모종의 희망을 일부 이루었기에 티켓 없이도 다른 지구의 다른 자신을 마주한다.
죄책감은 로다가 청소하는 매일의 낙서와 악취만큼이나 없어지지 않는다.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법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용서를 얻어내었다 하더라도 죄책감은 전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진정한 용서의 무게와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들을 소비해본다면 남는 것은 강화된 죄책감과 비가역적인 시간의 잔악무도함일 뿐이지 전반적으로 가학적일 그 과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을 속죄의 굴레를 보다 자발적으로 걷게 하는 정도에 그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상실은 산 사람이 지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단지, 덜어낸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다른 감정으로 덧붙여가는 과정이기에 로다도 또는 존도 이곳에서나 다른 지구에서나 상실의 비가역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상대방에게 가져다준 상실로 인한 죄책감을 로다는 어쨌든 직시해보려 한다. 그의 상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어떻게는 보다 나은 감정으로 바꿔보고자 그녀는 노력한다. 그녀가 얻고자 하는 것은 존의 용서이겠으나 큰 범주에서는 자신의 자신에 대한 용서도 포함한다. 스스로의 인생을 망친 그녀를 그녀는 용서할 수 없다. 작고 영악하나 비굴한 아이처럼 로다는 마치 존의 용서를 얻으면 본인 스스로도 용서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 그렇지만 용서는 죄책감과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둘은 알지 못하고, 그래서 계속 찝찝하다. 진정한 용서는 속죄의 시작에 불과하고, 모든 속죄의 과정은 한땀 한땀 본인이 본인의 죄의 무게만큼을 느끼면서 밟아가야 하기에 로다는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의 해소가 아닌 강화를 택하는 길을 걷게 되며 그와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을 해소하는 길을 걷는다. 가장 잔인하게, 그리고 가장 진실되게 특정한 이기적인 목적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그녀는 진정한 속죄를 향해 나아가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는 그 길을 보상으로 얻는다.
다른 지구는 명백하게 개인적인 바, 인지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바로 그 때에 지각되지 않는다. ‘멜랑콜리아’의 멜랑콜리아 행성처럼, 그 지구는 직접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특정한 현상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환상을 보여준다. 그에 더하여 각자의 상처를 해결해줄 만능열쇠처럼 멀리서 다가오지만 마냥 그렇지는 않다. 또 다른 로다가 환각이라면 다른 지구도 환각이겠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다. 마주침이 가져다 줄 순간적인 희망의 환영은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로다에게 다른 지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고, 어쩌면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다른 자신이 아닌 그저 자신을 직시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신체의 개별성으로 인해 다른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유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유추의 필요성은 적어도 마지막 장면에서의 로다에게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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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www.nappertime.com> | ||
반복되는 일상 중 오늘의 청소를 한다, 오염은 씻긴다, 반복되는 일상 중 내일의 청소를 한다, 오염은 씻기는 듯 하다, 오염은 씻기지 않고 그녀는 반복되는 매일의 청소를 한다. 그녀는 최선을 다 하려 하고, 그건 최선을 다 한 어느 최고의 결과보다도 값지다.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속죄는 너무 잔인하다. 그리고 그마저도 하지 않으려는 속죄는 너무 불행하며 비참하다. 그녀는 무기력한 듯 보이지만 결코 그러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지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청소부가 아닌, 다른 자신을 조용히 마주하거나 마주하고야 만다. 다른 지구는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불행 또한 그러하지만 반대로 자그마한 안도감도 함께하기에 영화는 새드엔딩이 아니다.
(제목은 toe – Because I hear you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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