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투 비 블루> 삶을 망치는 것과의 싸움: 쳇 베이커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하여
홍성빈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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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홍성빈] 어디선가 ‘삶이란 자신을 망치려는 것과의 싸움이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이 글귀에 담긴 뜻 그대로, 삶은 온갖 크고 작은 유혹들을 무기로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우리의 인생을 망치려든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자신을 망치려드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했던 재즈 트럼페터 쳇 베이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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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의 평생을 재즈와 마약, 여자에 탐닉했고 입에 담을 수 없을 악행들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악마 같은 남자가 연주하는 트럼펫 선율이 마치 천사의 그것처럼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아이러니에 주목한다. 악마적 삶을 살았던 생활인으로서의 쳇과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었던 예술가로서의 쳇.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온갖 환락에 몸을 맡겼던 삶과, 스스로 추락해 밑바닥 중의 밑바닥을 전전한 삶 사이 그 거대한 간극. <본 투 비 블루>는 이 간극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쳇 베이커가 어떤 선택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또 일으켜 세우는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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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이야기만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영락한 예술가 쳇 베이커(이하 쳇)가 삶의 밑바닥을 경험하고, 재기를 다짐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한다. 마침내 예전의 영광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순간, 그는 어떤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 선택에 의해 그는 어떤 것을 얻는 동시에 어떤 것을 영영 떠나보내고 만다. 이런 이야기다. 예상했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방점은 ‘선택’이라는 단어에 찍힌다.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라든가 불의의 사고 등의 변수를 제외한다면, 최소한의 자유 의지가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으므로. 쳇 역시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선택들 대부분이 그의 삶을 나락으로 끌어내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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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즈를 사랑하는 만큼 여자를 사랑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쳇은 성공한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한다. 마약이다. 분명 명분은 존재했을 것이다. 음악을 더 잘하기 위해, 마일즈 데이비스 같은 쟁쟁한 뮤지션(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용기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더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같은 낭만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선택은 쳇의 삶을 모조리 파탄내고 말았다.
더 나아가 그를 믿고 사랑하던 이들의 삶마저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망쳐버렸다. 그럼에도 쳇을 변호해야 한다면, 그는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 변론하겠다. 그럼에도 쳇을 비난해야 한다면, 나약한 인간 모두가 그런 파괴적인 선택을 하진 않는다고 손가락질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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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에게도 분명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적어도 픽션이 가미된 이 영화 속 쳇에겐 그런 기회가 온다. 제인이라는 여인과의 만남, 그녀가 쳇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그것이다. 최악의 마약 스캔들, 앞니가 부러져 나갈 정도의 가혹한 폭행 등으로 망가져버린 쳇을 그녀는 사랑한다. 물론 쳇 역시 그녀를 필요로 한다. 어째서 ‘필요로 한다’라고 표현했나.
쳇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헌신 덕에 쳇은 다시 재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정작 그녀의 삶은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쳇은 오직 그녀가 자신을 위해 곁에 있어주기만을 바랐다. 이것이 어쩌면 쳇만의 사랑 방식이었을까. 그가 다른 사랑의 방식을 선택했다면 그 역시 그녀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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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랑한다’와 ‘필요로 한다’ 사이에는 쳇의 삶과 예술 간의 괴리만큼이나 거대한 심연이 놓여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쳇은 제인으로 상징되는 ‘밝은 삶’과 마약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삶’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모종의 중대한 선택을 함으로써 무언가를 얻고 또 잃게 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훗날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맞이한 고독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생각해보면 그의 선택은 결국 옳지 않은 것이었다. 한 인간의 선택을 두고 그 시시비비를 판단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행위이지만, 이것은 그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삶을,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나약한 인간인 ‘쳇 베이커’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그를 한층 더 신비롭고 낭만적이게까지 만들어주는 이 아이러니를 대체 어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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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음영이 가득한 쳇의 얼굴을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으로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를 들려드리겠습니다.”라는 대사와 함께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 위로 흐르는 아름다운 재즈 넘버 ‘본 투 비 블루’. 어쩌면 이 곡은, 스스로 망쳐버린 인생에 대한 쳇 자신의 만가(輓歌)일지 모른다.
자신의 트럼펫 선율처럼 아름답게 살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이렇게 ‘우울하게 태어나 버려서(born to be blue)’ 나 역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담긴 선율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쓸쓸한 선율과 쳇의 비극적 인생을 통해 무엇을 절감하는가. 우습지만 그것은 아마도 다소간의 위안이 아닐까. 자신을 파괴할 지도 모를 결과를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삶이 가져오는 불편함과 절망의 강도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므로. 그렇지만 우리는 욕망에 이끌려 순간순간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마치 쳇처럼 말이다. 그와 다를 바 없이 우리는 모두 모순덩어리의 존재들이다. 앞서 삶이란 결국 자신을 망치려는 것과의 지난한 싸움이라 했다. 알다시피 이 싸움은 살아있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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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의 삶은 결과적으로 패배 그 자체였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끝까지 싸움을 단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일어서려는 가운데, 그가 뮤지션으로서 가장 빛나는 영광의 순간을 맛보았다는 사실이다. 절망이 깊었던 만큼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그 찰나와 같은 순간들. 우리가 <본 투 비 블루>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목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아름다움과 쓸쓸함, 안타까움이 뒤섞이는 황홀한 순간. 그래서 우리는 쳇의 삶으로부터 기묘한 위안을 얻는다.
불세출의 뮤지션이었으나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때로는 한심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 거기서 얻는 역설적 위안. 우리의 삶 역시 절망이 깊을수록 그만큼 더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는 조심스런 기대감. 그런 의미에서 <본 투 비 블루>는 ‘악마가 부르는 천사의 노래’라 지칭될 만큼 모순 그 자체였던, 쳇 베이커의 음악을 쏙 빼닮았다. 극중 에단 호크가 감동적으로 소화해낸 <My funny valentine>을 비롯, 트럼펫과 목소리 하나로 세상을 매혹시켰던 그의 수많은 재즈 명곡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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