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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www.tailorcontents.com> | ||
[디아티스트매거진=김범진] ‘더 랍스터’가 흥행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관객을 끌어들인 데에는 포스터도 한몫 했다고 본다. 국내판과 해외판이 차이는 있지만 상관없다. 둘 다 멋지다.
포스터만 보고 영화 내용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 포스터가 다르게 보이는 경우는 왕왕 있는데, ‘더 랍스터’가 그렇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또는 이루어질 사랑. 둘 다 지금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다. 데이비드(콜린 파렐 분)와 근시 여인(레이첼 맥아담스 분)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들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모든 건조함과 씁쓸함을 섞어 흔들면, 갈대밭에서 혼자 헤메는 장님이 된 근시 여인의 이미지와 함께 ‘더 랍스터’에 녹아들어 있는 모든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요약된다.
사실 처음에는 영화에서 사람들이 하도 공통점만을 가지고 사랑을 해대서 그걸 비판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 주제로 몇 번을 썼다. 그러다가 공통점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개인의 고유특성으로 타인의 고유특성을 측정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폭력이지만, 단순하게 그걸로 사랑하겠다면 상관할 바는 아닌 듯 싶었다. 물론 인물들이 하는 사랑이, 공통점을 찾아가며 하는 사랑들이 이질적인 것은 맞지만 사랑이 강요되는 환경 자체가 더 큰 문제임은 확실하고,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지 그 자체만으로 비난받을 것은 아니다.
‘더 랍스터’에서는 사랑을 강요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을 강요해서 사랑하는 것과 그냥 사랑하는 것은 매우 다른데, 어쨌든 그는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성공하고, 그리고 그는 눈을 뽑을지 말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사랑하지 않을 자유 또한 보장받는다. 근시 여인이 장님이 되었다고 해서 일차원적으로 같이 장님이 될 필요는 없다. 상대방과의 공통점은 가까워지는 데에 도움이 되겠으나, 그건 사랑의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그냥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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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collider.com> | ||
데이비드는 근시라서 버림받고 근시라서 근시인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이 운명의 이물감은 영화에서는 그가 하는 사랑의 달콤함에 가려진다. 다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랑하려 하고, 기어이 사랑하기 싫다면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한다. 삶이 있어야 사랑도 할 수 있지만, ‘더 랍스터’에서 전제한 조건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해야 살 수 있다는 사랑과 삶의 관계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 전제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세계에서, 데이비드는 애먼 사랑을 하려고 하고 결국 사랑하는 데에 성공하기는 한다. 주체적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달콤함이 크다고 해서 삶과 사랑의 전환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데이비드의 잘못은 딱히 없다. 그 또는 호텔의 사람들은 단지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거나 의지가 없었을 뿐이다. 모든 일정들은 강제로 짝을 찾는 데에 집중되고, 성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냥 사랑하지 않을 뿐이었는데, ‘사랑하지 않음’은 이제 생존에 반하는 요건이 된다. 그렇게까지 사랑을 해서 뭐가 좋을지, 강요된 사랑이라도 괜찮을지는 모르겠다. 호텔에서는 삶마저도 사랑하기 위한 요소로 추락한다.
숲이라고 다르진 않다. 지금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평생 그렇다는 것은 아닌데, 양 쪽 모두 너무 극단적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완충지대가 없다. 모두들 하나씩은 강요하고, 강요받지 않을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이 없으며 그래서 호텔을 나와버리고 숲에서도 나와버려서 이제는 자발적인 사랑을 하게 된 데이비드와 근시 여인이 디딜 땅은 없다. 숲에서는 적어도 사랑이 강요되지는 않지만, 그래 봐야 삶과 사랑이 전환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앞서 삶을 두고 싶은 자들은, 자신과 주변을 속이며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디든 갈 곳이 없게 된다.
랍스터가 되는 것은 대안이라고 보기에는 형벌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사랑이라는 것은 일단 해라, 하지 마라, 라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 더해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은 너무나도 다양해서 개인적이고 고유하다. ‘더 랍스터’에서 제시하는 사랑의 안티테제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각자에게 일신전속적일 사랑은 그 자신마저도 함부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 삶과 극도로 밀접하기 때문이다. 삶이 끝나는 순간에 삶을 정의할 수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끝난 삶을 후대에 정의할 수 있는가? 그건 쉽지 않다. 일면들을 따서 해석하고 음미해볼 수는 있어도, 전체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반증을 가져오고 그만큼 취약하다. 모두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지만, 그를 통해 자기확신성을 보장하고자 하지만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사랑 같은 것들은 그와 평행하게 정의가 지속된다.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그 시도가 진행되는 속성 자체를 영속적으로 부여해 주며, 이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정의되지 않을 것이지만 정의되어가고 있으며,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 진행 자체로 우리는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사랑을 통해 정확히 그만큼의 달콤함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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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www.telegraph.co.uk> | ||
데이비드는,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모두는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사랑을 정의해가는 중이다. 이별 후의 아픔도 만남 중의 달콤함도,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시간들도 이 과정에 포함되어 무한한 방정식을 만든다. 풀 수 있다. 하지만 풀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인은 시력에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환상성을 벗어던진 그들의 미래는 완벽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정도로 매끈하지 않을 것이며, 바로 그래서 알았다고 생각한 사랑의 의미를 사실은 지금도 모르며 단지 그(그녀)와 함께 한 시간동안 알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근시야 그냥 그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정의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면 사랑한다(할 수 있다)’ 정도가 부각되어왔기에 시력에 목매달게 했던 것이고, 시간이 지나 언젠가 행복한 두 사람이 세월을 돌아보며, 함께 했던 시간을 되짚으며 깨닫게 될 것은 그 시간까지 둘은 서로를 사랑해 왔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서로는 상대방과 함께 하는 시간들로 채운 자신의 인생을 통해 사랑을 정의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은 완성된 사랑의 정의보다 값지다.
눈의 적출 여부에 상관없이 어떤 결말도 둘이 지금 사랑한다는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나중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데이비드가 또는 근시 여인이 살아가는 한 그들이 빚어온 사랑의 부분에는 근시 여인이, 데이비드 자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둘의 시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울 사랑의 모습은 둘 다 근시이거나 장님이라는 점이 아니며, 장님이 되어서라도 그녀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을 지속하고 싶다는 순수하고 그래서 강력한 데이비드의 의지이다. 맞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번역될 그 마음 말이다. 미래가 어떠하든 그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으로 정의해본 자신의 사랑을 바로 당신과 진행하겠다는 의지가 진정하고 간절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이것이 ‘더 랍스터’에서 단 하나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질감이 드는 이유라는 것도 말이다.
(제목은 Moby – The Perfect Life(with Wayne Coyne)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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