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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 = 김정민 칼럼니스트] “날 구해줄거란 생각엔 변함이 없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그럼에도 사랑하자’라고 말하는 영화였다. 모든 사랑이 결국 시간 속에서 권태기를 맞아 스러질지라도 ‘사랑하자’라고 외치며 ‘사랑은 결국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놓지 않게 하는 영화였다. 지난주 <이터널 선샤인>의 이란성 쌍둥이같은 영화가 나왔다. 감독과 각본은 찰리 카우프만.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쓴 사람이다. 시간 속에서 권태를 맞는 사랑, 독특한 설정, 굉장한 완성도. <아노말리사>의 많은 부분이 <이터널 선샤인>을 연상케 했다. 다만 분위기가 상당히 다를 뿐.
<아노말리사>는 희한한 사랑영화다. 일반적인 사랑 영화들과 달리 사랑을 예찬하기보다 비관하는 시선이 더 강하다. 비관적인 <이터널 선샤인>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랑이 시간 속에서 권태기를 맞고 스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자? 결국 다 똑같은데 사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라고 독하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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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노말리사 스틸컷 | ||
<아노말리사>의 독법은 영화가 초반 5분에 모두 가르쳐준다. 유유히 비행하는 비행기를 찍은 숏이 사실은 주인공 ‘마이클’의 시점 숏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이 영화는 ‘마이클’의 시선 안 세상을 그린 영화라는 것이다. ‘마이클’의 시점 안은 예민하고 경계심 가득하며 황폐하다. 그의 감각 속 세상은 시끄럽고 뭔가 음울하며 위험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하다. 심지어 영화 속 ‘리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같다.(한 성우가 다 연기했다.) 권태가 한바탕 휩쓸고 간 ‘마이클’의 내면엔 모든 것이 같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붕괴 직전이다.
한 영화가 한 캐릭터의 시점 안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라면 이 캐릭터의 마음에 대한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로 볼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아노말리사>는 ‘마이클’이란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해석을 다양하게 해낼 수 있다. ‘마이클’을 현대인의 초상이라 보고 영화를 보아낼 수 있으며, 자의식이 강한 수컷으로 보고 영화를 읽어낼 수도 있다. 내게는 ‘마이클’이 권태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한 남자라는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마이클’에게 ‘리사’는 아직 권태가 휩쓸어가지 못한 자리다. 특별했다고 믿은 옛사랑마저 권태에 잡아먹혀 얼굴과 목소리가 다른 사람과 같아져버렸고, 꿈을 꿔도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를 한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여 그로부터 도망치는 꿈을 꾸는 상황에서 ‘리사’는 ‘마이클’에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삶의 이유가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 감정을 관객이 체감하도록 디테일에 공을 많이 들였다. ‘마이클’의 황폐한 내면부터 ‘마이클’과 ‘리사’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기류까지 모든 묘사가 세밀하다. 영화 초반 ‘마이클’이 호텔 직원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순간순간 드러나는 신경질적인 모습이라던지, 다른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언급하고 쳐다본다고 묘사한다던지 하는 장면이 그렇다. 심지어 담배를 피는 장면에서도 ‘마이클’의 지치고 지루한 상태를 잘 그려낸다. 두 사람의 사랑을 묘사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마이클’과 ‘리사’가 한 방에서 나누는 대화의 리듬은 로맨틱한데다 실감이 대단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섹스 신(scene)인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이정도의 구현력을 보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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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노말리사 스틸컷 | ||
권태의 피로감에 지쳐 있다가 ‘리사’를 통해 다시 삶의 이유를 찾은 ‘마이클’은 결국 어떻게 될까? 애석하게도 또다시 권태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공격엔 ‘리사’도 지켜내지 못한다. 사실 이 결말은 이미 암시가 되어있었다. 옛사랑과의 비참한 만남 후 우연히 성인용품점에 들른 ‘마이클’은 한 일본 인형을 보고 “예쁘네요.”라고 말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인형이 ‘리사’처럼 오른쪽 눈에 흉터가 있단 것이다. 그리고 이 인형의 목소리도 리사처럼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다르다. 그리고 ‘마이클’이 예쁘다고 느꼈단 것은 이 인형의 얼굴은 다른 얼굴들과 같게 보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 이 인형은 사실상 ‘리사’를 은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인형은 골동품으로 세월에 의해 해지고 망가진 상태다. 영화는 이 인형을 통해 미리 일러둔 것이다. “‘리사’라고 다를까?”
영화 초반 ‘택시 기사’는 ‘마이클’에게 “여기 동물원을 가보라. 하루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이클’은 이 말을 귀찮게 여긴다. 그리고 영화 후반 ‘리사’는 ‘마이클’에게 동물원을 보러 가자고 한다. ‘마이클’은 ‘택시기사’가 이 말을 했을 때처럼 이를 귀찮게 여긴다. 자고나니 이미 사랑이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동물원은 하루면 볼 수 있다는 것은 ‘리사’와의 사랑도 애초부터 하루면 끝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리사’와의 사랑이 단 하룻밤이었다는 것이 흥미롭긴 하다. 남자라는 종이 섹스 전후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비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현대인들이 어떤 것이든 전보다 빨리 권태감을 느낀다는 것을 생각할 때, 권태라는 괴물이 하루만에 찾아 온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후자로 볼 때는 이 영화를 사랑 이외의 이야기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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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노말리사 스틸컷 | ||
마지막 ‘마이클’의 모습은 몹시 처량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역시나 많은 친지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얼굴과 목소리가 같게 보이니 당연하다. 여전히 ‘마이클’은 그 어떤 권태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마이클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사온 일본 인형 골동품이나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앞에 기적같이 나타났던 새로운 사랑의 끝 역시 낡고 부서진 인형일 뿐이라 현실을 앞에 주저앉은 ‘마이클’을 두고 카메라는 서서히 멀어진다.
한없이 비관적이다. 이 영화는 우린 사랑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저 우리가 실제로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영화적으로 제시하면서 우리가 권태감에 휩쓸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 절망적이고 답답한 현실에서 우린 어떤 답을 찾아야하는가? 각자가 생각해보아야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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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노말리사 스틸컷 | ||
첨언하자면 이 영화는 에필로그에서 ‘리사’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마이클’을 벗어난 카메라는 ‘리사’에게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장면은 채도가 높고 밝게 빛나고 있다. 그 장면은 ‘마이클’의 시선이 아니다. 이 장면에서 ‘리사’의 친구의 얼굴은 ‘마이클’의 시선일 때와는 다른 얼굴이다.(카메라는 이를 강조한다.) ‘리사’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리사’는 편지를 통해 ‘마이클’에게 감사를 전하고 새로운 삶의 활력을 얻었음을 전한다. ‘리사’의 결말은 희망이다. ‘마이클’에게는 절망을 재확인 시켜주었던 그 하룻밤의 사랑이 놀랍게도 ‘리사’에겐 희망을 가져다준 것이 된 것이다.
영화는 ‘리사’의 그 감정을 ‘마이클’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마이클’의 세계와도 연결시키려 한다. 그 사랑이 덧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려 한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마이클’이 옛 연인으로부터 원망의 편지를 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감동적인 면이 있다. 마지막 편지는 마치 첫 편지로 수렁에 빠진 ‘마이클’을 구해내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장면을 같은 사건에도 각자가 서로 반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낼 수도 있다. 이 편지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오는 도입부에 마이클의 모습은 매우 비참했기 때문에 대조법으로 보이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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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노말리사 스틸컷 | ||
마지막 장면의 그 화사한 햇빛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느낌이 지배적인 영화고, 비관적인 영화다. <이터널 선샤인>은 권태의 수렁 속에서 두 연인이 함께 손잡고 극복해나가보자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아노말리사>에서는 남자는 여전히 수렁에 남겨진 채 마무리되었지 않나. ‘마이클’은 끝내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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