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 You, But Smile. 조금 다른 두 기다림,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김범진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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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디아티스트매거진=김범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질문을 하나씩 안기고 시작한다. 두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한 여자는 알고 다른 여자는 모른다. 그래도 둘은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시간에 관한 영화이며 대상은 주인공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는 생사가 불분명하다. 영화의 모든 장면들, 배우의 모든 몸짓과 눈빛들은 그의 죽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나 어디까지나 간주가 아닌 추정에 불과하다. 그 모든 개연성은 죽음이라는 비가역적 행위에 대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은 ‘아는 여자’의 바람을 반영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녀의 희망과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모르는 여자’와 관객 모두를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확정성의 위태로움과 그것이 피워내는 작은 의심이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줄리엣 비노쉬 분)’의 미세한 떨림과 공명한다. 과연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고, ‘모르고 찾아온 여자(루 드 라쥬 분)’는 무엇을 모르기에 불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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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a의 존재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a를 증명해도 되지만 a가 없지 않음을 증명해도 된다. ‘아는 여자’는 쥬세페(지오바니 안젤로 분)의 죽음은 증명하지 않으려 하고, 생존은 증명할 수가 없다. 그녀는 그래서 그가 죽지 않았음을 스스로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마침 인연이 닿은 ‘모르는 여자’가 찾아왔고 ‘아는 여자’는 그녀를 통해 길고 슬픈, 증명할 수 없는 증명을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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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아는 여자’는, 그녀는 ‘모르는 여자’가 그려내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 어쩌면 아들을 추억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희망과는 달리 연인의 기억 속의 아들은 ‘아는 여자’가 아는 아들과는 달랐고 그에 더하여 ‘아는 여자’와 ‘모르는 여자’가 서로 달랐기에 연인이 불러온 아들의 모습에서 본인의 아들을 보기란 쉽지 않음을 통감한다. 정면에서의 인물과 측면에서의 인물은 차이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사이에서, 얼굴을 돌려 둘 모두를 마주해줄 본인이 없어서 ‘아는 여자’의 행위에서는 향기보다 악취를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걸 알지만서도 또 그녀를 변호하고 싶어진다. 그 모든 악취를 견뎌내면서라도 하루가 지날수록 어떻게든 흐려져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잊고 싶지 않은 ‘아는 여자’의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는 여자’는 중요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리지’못한다. 기다린다는 말을 넣어 문장을 만들려면 목적어가 필요한데 명백한 목적어인 아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었다. 실질적으로 ‘아는 여자’가 기다리는 것은, 아들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져 갈 아들에 대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기억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것에는 이 사실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녀는 더 슬프다. 기억들 중 일부가 이 ‘모르는 여자’와 함께 돌아오나 했더니, 연인의 손을 잡고 오는 아들의 추억은 어머니가 잘 알지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어 ‘모르는 여자’는 끝내 환영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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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반면에 ‘모르는 여자’는 억울하다. 서먹했던 연인과 연락이 닿아 멀리 왔더니 연인의 어머니가 그녀를 맞이하고, 당사자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연인을 ‘기다린다’. 그리고 연인이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는 기다림을 멈춘다. 연인의 어머니에게 우아하고 정중하게 버림받으며 그 대가로 기다림은 그곳에 내려두고 떠나는 대신, 딱 그만큼의 슬픔을 안고 돌아가는 그녀는 사실 다른 것을 안다. ‘아는 여자’의 사랑의 모습을 어렴풋이 이해하며 사랑이 두 여자 사이에서 다른 모습을 갖게 만드는 바로 그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하는 그녀를 말이다. 그래서 ‘모르는 여자’는 억울하지만 양손에 가득 위로를 들고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어떤 사실 하나일 뿐, ‘아는 여자’를 ‘모르는 여자’는 이제 알게 된다.
실질적으로 아픔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나, 영화에서는 상대방의 아픔을 연민으로 이해하는 만큼이 공동의 원인에서 기인하는 서로 다른 아픔을 경감하는 방법 중 하나임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행위로도 상실의 아픔의 절대량을 줄일 수 없다는 것도, 단지 자신이 주체적으로 잊거나 지워가는 것이 통증을 더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음도 그러하다. 하지만 안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며,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슬픔이 슬픔에게 건네는 말은 슬픔일 수 없다는 사실만이 그녀들에게는 위로이겠으나, 위로는 어쩌면 껍데기만 있을 뿐 본질은 아픔의 공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머리랑 가슴의 거리는 생각보다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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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그냥, 그런 내용이다. 각자가 기다리는 대상은 같지만, 거울의 양면처럼 죽은 대상을 기다리는 쪽과 살아 있는 대상을 기다리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밝힐/밝혀질 사실에 의해 입는 치명상은 비등비등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만큼 주관적이겠으나 분명하게 닮았고 완벽하게 다르다. 기다린다는 행위 자체는 비슷한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를 그 비슷함 사이에 숨겨진 다름에 집중하게 하고, 실제로 두 여자는 조금 다른 기다림을 함께하며 이야기의 말미에 그 차이만큼 조용하게 또는 격렬하게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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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두 여자의 가장 큰 차이는 작은 역설성에 있다. ‘아는 여자’는 덜 아프기 위해 그 아픔을 품고 더 아파하며 살아야 하거나 살아갈 것이다. 고통의 증감은 그녀에게 반복적으로 주기를 가지고 찾아올 것이며 또 상처는 그래서 아물기 어려울 것이다. ‘모르는 여자’는 사실 잠시 구원받을 수 있었다. 연인을 잊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을 바로 그 장면이 지나고 나서,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연인을 선택해버리고, 그 진실함에 대한 대가는 상실로만 느낄 수 있는 어둡고 진한 사랑의 단면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The XX’의 “Missing”이 시작되면 우리는 영화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 두 여자가 갖게 된 앞날들이 선물인지 형벌인지에 대해 – 각자 모두 다른, 단 하나의 대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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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네이버 영화) | ||
그렇게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관객이 치우쳐진 방향과 기울기에 따라 두 여자 중 한명에게서는 끝난다. 한 명에게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당신을 그리워하는 시간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한명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은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는 바, 다만 상대방은 그녀가 그의 묘비에 어떤 추모를 새겼는지 궁금해 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을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삶이 타인의 삶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고, 사랑하는 타인이면 그 과정에는 아픔마저 함께한다. 이 영화는 타인이 증명하려는 삶을 그리는 조금 아픈 영화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그리움은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그리움과 함께 하는 아픔의 정도마저 모두 다르다. 그래서 그렇게도 우리는 ‘아는 여자’와 ‘모르는 여자’의 사이 어딘가에서 왔다갔다를 반복한다. 잠시 멈추고 싶어질 때, 영화관은 불을 켜고 우리 등을 떠민다. 나서는 당신은 두 여자 중 하나는 쥬세페의 묘비에 ‘Miss You, But Smile’라고 적었으면 할 것이다. 조금은 무기력하게 뒤를 돌아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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