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메뉴 바로가기 (상단) 본문 컨텐츠 바로가기 주요 메뉴 바로가기 (하단)

시인이 그림을 그리는 방법, 윌리엄 켄트리지

문희경 기자 조회수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Google 검색에서 디아티스트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 국립현대미술관, 윌리엄 켄트리지 展 : 주변적 고찰 (2015.12.1 ~ 1026. 3. 27)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싸구려 감상에 젖은 소리이긴 하지만, 한 때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세대들을 시기했던 적이 있다. 혹은 ‘격동의 땅’에 태어난 사람들을. 이것은 내가 예술을 꿈꾸었던 철없던 시절의 얘기로, 막연하게나마 인간의 모든 창작활동은 역사적 맥락들을 기록하는 아카이브(Archive)의 성격(그 기록이 실제로 다음 세대로 온전히 전승되어 그야말로 ‘기록’이 되느냐 아니냐는 그 다음 문제라고 치더라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인류사에 ‘기념비적’ 의의를 갖는 사건들(가령 예를 들면 세계대전이나 지독한 군부독재, 인터넷과 컴퓨터의 보급 등등)을, 역사 교과서나 기타 문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소 겪어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따라서 (보통의 한 개인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만을 생각해 볼 때) 별다른 노력 없이도 가까이에서 예술적 영감을 풍부하게 습득할 수 있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은 오래가지 못하고 폐기처분되었다. 순진하게도 당시의 나는 ‘예술가’와 ‘개인’으로서의 두 정체성을 분리 가능한 별개의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은 다분히 분열증적이다. 조잡하고 난해해서 이해 불가능한, 저열한 그림이라는 뜻으로서의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 번에 명확한 포착이 불가능한 것들을 그려낸 그림이라는 뜻이다.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상징이나 단어, 오브제들로 가득찬 그의 그림들은 각각의 낱장들이 하나, 하나의 사물(혹은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초 단위로 나눠 촬영한 필름들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애니메이션을 위한 드로잉의 경우 연결을 위해 수많은 낱장의 그림들을 따로따로 그리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처음 그린 그림 위에 지우개질로 수정을 가하고 다시 그 위에 다음 장면을 그리는―이렇게 작업하면 첫 장면의 잔상이 맨 마지막 장면까지 남아있게 된다―그만의 작업 방식이 더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수많은 필름들이 모여 완성한 하나의 사건(애니메이션) 역시 명확한 기승전결(메시지)을 찾아내기 어렵다. 이를테면 잘 정돈된 플롯을 가진 영화라기보다 감독의 자의식이 많이 투영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나 할까. 혹은 작가 자신이 꾸었던 ‘꿈’을 영상으로 재현한 듯한 인상도 준다. 무의식과 상징들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에서는 임의로 고른 한 장의 장면만으로 그것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오직 커다란 전체의 서사 안에서만 개별적인 이미지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렇듯 켄트리지의 그림들은 낱장 하나하나가 쪼개어진 ‘시간’을 함축하고 있기에 난해하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개별적으로 액자에 걸려있을 때 보다 그 그림들이 모아져 하나로 완성된 영상작업(애니메이션)일 때 비로소 ‘읽힌다’.

(*사담이지만 애니메이션 작업 외에, 전시 초입에 플랍북 작품들과 같은 섹션에 있던 ‘drawing lesson’시리즈는 유독 이해하기 힘들었다. 작가가 직접 영상 속에 등장해 반복적인 모션들로 어떠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연기해 보이는 형식의 작품들이었는데, 그의 그림과 영상작업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브제들 ―확성기, 메트로놈, 축음기, 컴퍼스 따위― 이 상징하는 것이라든지(이 네 가지의 오브제들은 드로잉과 비디오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속에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영상에서 켄트리지가 그런 오브제들을 가지고 반복하는 동작들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에게 이 오브제들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 그러고 보니 <drawing lesson>시리즈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비디오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준다. 가령, 분할촬영한 뒤 한 화면으로 편집한다던지(각 영상 마다 켄트리지가 여러 명으로 등장해 서로 대화하고 몸짓을 주고받는다), 뚜렷한 스토리 없이 같은 행동이나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성이라든지 하는 식이다.)

   
▲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년 요하네스버그(남아프리카공화국) 출생.

소수의 백인층이 다수의 흑인과 유색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에 태어난 켄트리지에게, 백인이면서 인권변호사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그가 아프리카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어떠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하다. 백인이었으므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정권의 폭압으로부터 한 발 비껴나 있었지만, 동시에 인권변호사였던 어머니 아버지의 영향으로 바로 그 폭압에 희생되는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보며 자란 그는 가해자로서의 백인이나 피해자였던 흑인과는 또 다른 제3자적 시각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시선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고뇌와 특유의 ‘분열증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소호와 펠릭스>연작이 바로 그런 ‘켄트리지적 세계관’과, 전시의 제목인 ‘주변적 고찰’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종차별적 법제들을 발판삼아 부를 독식한 백인 자본가 ‘소호’와, 켄트리지 자신처럼(혹은 그의 부모님처럼) 백인이지만 흑인민중의 편에 서서 고뇌하는 시인 ‘펠릭스’를 소호의 아내 ‘엑스타인 부인(Mrs. Extine)’으로 연결해, 요하네스버그를 비롯한 당시 아프리카의 사회상을 다층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경제 구조를 이용해 부를 구축했지만, 그 모든 것도 떠나간 아내와 늙고 병든 자신의 신체 앞에서는 무의미해지는 남자 ‘소호’. 그를 통해, 당시 독식한 권력과 자본으로 폭력을 휘둘렀던 백인 지배층 이면에 감춰진 초라함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절망하는 지식인 ‘펠릭스’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총알에 수없이 스러지는 흑인민중을 지켜보며, 자신이 시대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시(詩)’로 남아공 젊은이들의 구멍 난 시체를 덮어준다. 연작 중 두 번째로 상영되는 <망명중인 펠릭스(Felix in Exile)>에서 플롯은 처음부터 끝까지 펠릭스의 방(혹은 작업실)안에서 진행되는데, 흑백의 화면 곳곳에서 터지듯 흘러넘치는 파란색의 ‘물’이미지는 대사도 표정도 없는 시인 펠릭스의 슬픔을 그야말로 ‘시(詩)적으로’ 표현해낸다.

   
▲ <소호와 펠릭스>연작 중 <망명중인 펠릭스(Felix in exile)>의 한 장면.

다시, 격동의 땅,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이들을 시기했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로 돌아오자. 예술이란 결국 인류가 지구에 발을 디딘 이래 가장 오래 유지해온 소통의 채널이고, 때문에 당연하게도 예술가라는 특수한 정체성은 사회적 존재인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때문에 영감이 가득한 삶은 본질적으로 고달플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좀 더 공적인 범위, 즉 ‘사회’로 확장되면 역사성을 갖는다. 공적인 상처를 기록하는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가 있지만, 그것을 ‘기억되기 위한’ 기록으로 만드는 예술은 보다 더 고차원적인 노력과 고통을 수반한다. 또한 대다수 예술작업의 특성상 예술가는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까지, 혹은 나오고 난 이후에도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훌륭한 영감을 많이 가진 예술가일수록, 또 그것을 작품으로 재생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예술가일수록 인간으로서 고독하고, 또 고달프다. 물론 켄트리지가 불행할 것이라 단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며 질투 아닌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예술을 꿈꾸지 않는, 예술을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예술과 예술가가 세상에서 갖는 고독한 무게감, 그 위대함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그는 예술가라는 이름과 그것이 가진 무게에 걸맞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의 그림이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

관련 기사

author-img
문희경 기자
sinclair@theartist.co.kr

댓글0

300

댓글0

[칼럼] 랭킹 뉴스

  • 당신의 관념을 인버전할 테넷
  • 세계로 나아간 한국영화 Choice 5
  • 2019년 한국영화계 키워드 Choice 5
  • 제40회 청룡영화상 주요 부분 수상 예상 Choice 5 (인물 부문)
  • 여성이 주도한 한국영화 Choice 5
  • 나는 사물이 되고 싶다

당신을 위한 인기글

  • 한국에서는 평범한데…北 평양 고위층만 쓴다는 귀한 생필품의 실체
    한국에서는 평범한데…北 평양 고위층만 쓴다는 귀한 생필품의 실체
  • 현대차가 진짜 인수하려고 했던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 차
    현대차가 진짜 인수하려고 했던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 차
  • DMZ 지뢰에 발목 잃은 중령이 깨어나자마자 한 말
    DMZ 지뢰에 발목 잃은 중령이 깨어나자마자 한 말
  • 한국인 99%가 모르는…美이 부러워 하는 北멸망시킬 한국군 특수부대
    한국인 99%가 모르는…美이 부러워 하는 北멸망시킬 한국군 특수부대
  • 최태원 회장을 능가하는 2조원 대 위자료를 내야하는 기업인
    최태원 회장을 능가하는 2조원 대 위자료를 내야하는 기업인
  • 본인은 15억 벌고 직원 월급 166만원…악덕 고용주로 불린 국회의원 ‘논란’
    본인은 15억 벌고 직원 월급 166만원…악덕 고용주로 불린 국회의원 ‘논란’
  • 한동훈 처남이 저지른 엽기적인 성범죄 “택시에서 여검사를…”
    한동훈 처남이 저지른 엽기적인 성범죄 “택시에서 여검사를…”
  • 초저가 강세 내새웠는데…中 테무가 한국에서 망한 진짜 이유
    초저가 강세 내새웠는데…中 테무가 한국에서 망한 진짜 이유

공유하기

[cosmosfarm_share_buttons url="https://theartist.co.kr" title="디아티스트" align="cente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