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랄 게, 사실 별 거 없다.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달 간의 방학 중 3일 정도 투자해서 내려갔던 곳이 ‘포항’, 대학생 되기 전까지 지겹도록 있었던 정말 진정한 내 집이 있는 곳이다. 더 있을 수 있는데 왜 짧게 있었냐고 물으면 주말 알바라든지, 3일이상 보면 꼭 사춘기 때 처럼 말다툼을 하게 된다든지. 오로지 서울에서의 ‘나’를 적응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때였다.
혼자 서울에 올라온 지 2년 넘어가던 즈음에 마음 속에서 조금씩 주위에서 달래줄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이 피어나고 있었다. 짧게 짧게 가던 고향의 집이 갑자기 너무나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새해, 그만둔 아르바이트, 등. 어째 저째하여 이제는 2주 동안 포항에 있을 여유가 생겼다.
포항은 과메기가 유명하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다, 경주와 가깝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기본 10분이 넘는다, 상생의 손이 관광지이다, 지하철이 없다. 구구절절. 아쉽게도 내가 할 얘기는 포항에 올 여행자들을 위한 지침서가 아니다.
2016년이 되기까지 온갖 준비로 안중에 없었던 옛추억과 그곳에 있었던 나의 감정들을 직시해보려는 프로젝트 같은 느낌일 뿐이다. 그것이 진정 여행으로서 주는 감동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총 두 번의 이사를 했다. 고등학생 1학년 때, 17년 동안 살았던 황금맨션 1층을 떠났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 내가 다니는 학교와 더 멀어진 ‘유강’에 위치한 아파트의 13층으로 이사를 했다. 첫 날, 좁았지만 많은 흔적이 있던 황금맨션이 그리워서 나만의 방을 얻었음에도 자기 전까지 눈물을 흘렸다. 통학버스에 적응하는 것도 처음엔 정말 버거웠다. ‘걸어서 5분거리였는데.’ 하면서 말이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서울로 대학교를 가고 난 뒤, 나 없이 가족들은 다시 ‘연일’로 옮기게 되었다. 추억의 그 장소가 아닌 강과 다리와 가까운. 이때까지의 집 중 제일 어색했던 장소.
그래서 였을까. 서울로 간 이후로 3일씩 찔끔 찔끔 방문하던 것의 이유. 목적지 바뀐 버스도 어색했고 비밀번호도 어색했고 내가 다녔던 연일초등학교와 라이벌이었던 형산초등학교와 가까운 내 집은 더욱 어색했다.
이번에 마음먹은 2주는 발벗고 나서보았다. 물론 이때까지 갈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지나가보는 것이 꺼려졌었다. 초등학교든, 어디든 내가 어릴 적 지나가고 당연하게 여겼던 장소들 모두.
추억과 마주볼 수 있는 장소는 정말 많지만 핵심적으로 두 곳만 뽑았다.
1. 연일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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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날씨가 좋은 하루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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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제일 아쉬웠던 세련된 담장, 벽돌담을 허물어 등하교 시간 외에는 오픈하지 않는 듯 했다. (우)본교 방문을 환영하는 귀여운 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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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있는 도토리 나무들, 10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병설유치원 때 부터 만남의 장소였던 뒷 공원. 도토리가 너무 많아 주워가도 남을 정도였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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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독 넓게만 느껴지던 운동장이 어느새 몇걸음만으로도 가로지를 수 있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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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있는 운동장, 초록 색을 따라 달리기 시합을 하던 게 생생하게 기억된다. | ||
바뀐 것이 너무 많았다. 너무 신식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나의 초등학교에 엘리베이터라니, 돌로 깔려있던 건물 사이사이의 공간이 고르게 배치된 타일로 변하다니, 급식소가 3배가 되다니, 칙칙하고 낮아서 넘나들었던 벽돌담들이 이제는 하얗고 세련된 높은 기둥들로 뒷문과 쪽문 모두 휴일엔 닫아놓다니 등등 투덜대다가.
어릴 적 도토리를 줍던 뒷 공원도 가보고.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났었던 건물 뒷 편의 철문도 가보고. 문이 열려 들어가본 5-1반의 교실과 그대로 위치한 컴퓨터실도 보고 뭉클하고.
바뀐 곳과 여전한 곳 그 사이에서 모든 추억들을 쏟아낸다. ‘그랬었지, 그랬었지.’ 하면서 추억의 끝은 없었다. 끊임없이 거듭되어서 되새겨졌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의 ‘빙봉’이 튀어나온 듯.
초등학생 때 끊임없이 들었던 ‘100년 된’ 초등학교. 연일 초등학교. 어린 아이들의 머릿 속엔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생각도 못했으리라. 몇 걸음 걸어보니 작아 보이는 운동장 속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막 찍는다. 항상 당연한 듯 원래 있던 것들을 찍어대며 감탄하는 언니를 보며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은 꺄르르 웃으며 지나간다.
등굣길과 하굣길을 걷다가, 집 앞 연일시장에서 항상 사먹던 2000원어치의 가래떡과 함께 황금맨션으로 발길을 돌린다.
2. 황금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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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에서 봤던 페인팅 그대로 남아있다. 작고 아담해서 볼수록 아늑한 느낌을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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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에 얘기했듯, 정말 맛있었던, 17년 단골 짜장면집. 아직도 운영 중이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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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미니 소나무 (우)시간의 흐름이 보이는 옛날 우리집 1층 앞 계단. | ||
17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파트. 가동과 나동이 있고 나동 뒤의 단풍나무가 가득한 주차장은 ‘다동’이라고 불렀다. 행복했던 기억에 대한 인터뷰를 했을 때에 등장했던 장소들 모두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찍었다. 인터뷰는 칼럼 아래 링크로 첨부해놓았다.
이상하게 제일 좋았던 집을 꼽으라면 이곳을 꼽겠다. 집이라는 게, 사실 넓고 좁고, 신식이고 구식이고 따지기 전에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기억된다. 그곳에서 내 자신의 근본을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그냥 나는 마음이 더 가고 애틋하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동경하는 나로써 그때를 뒤돌아 보는 것은 최고의 놀이였다. 나뭇잎을 돌로 빻던 장소, 베란다에서 빨래하는 엄마와 얘기할 수 있었던 장소, 화분에 물 주는 엄마와 밖과 안을 넘나들며 이야기할 수 있었던 장소, 어느 때의 햇빛보다 따뜻했던 어릴 적 낮잠 자던 그 공간. 모두 내 감각으로 아직 남아있다.
다동, 이제는 사라진 나무들이 많았다. 주차 공간을 확보해야 했던 탓인 듯 하다. 겨울이라 나뭇잎 없이 앙상한 단풍나무들. 옛날 가동, 우리 통로에는 나와 동갑인 친구가 3명 있었다. 이사를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은 나였다. 친구들 중 서울 근처로, 제일 멀리 이사가게 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친구를 위해 우리는 다동 의미가 있을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찾아낸 건 ‘미니 소나무’ (우리가 지은 이름) 주먹만한 크기인 나무였다. 총 세 개였던 나무들에 각자 담당을 정해주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큰 소나무가 되면 찾으러 오자고 약속을 했었다. 아쉽게도 그 장소의 나무들은 주차장이 된 후였다. 그것에 대한 애착이 컸던 현재의 나는 실망스럽게 발길을 돌리던 중 그 옆의 공간에서 미니 소나무를 찾아내었다. 두 개가 남아있었다. 그 것이 나무인지, 풀인지 지금도 그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더라도 어릴 때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일을 요즘은 왜 못하고 살아가는 건지. 주위를 왜 바라보고 살지 않는 건지. 건조해진 마음을 정화해주는 느낌이었다.
없어진 공중전화 부스, 문구점, 오락실, 영어학원, 반대로 그대로 있는 문구점, 음식점, 짝퉁 신발가게, 사진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연일시장에 있는 누구보다 많이 바라보고 느꼈을 것이다. 오로지 혼자만 만족할 수 있는 여행 루트. 그곳에 스며들어 봤어야 느낄 것이 많은 루트. 서울에서는 내가 가는 곳이 아니면 바라보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주변 모든 것에 관심을 두는 게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 아무런 추억들 없이 자란 어른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순수했었고, 동심을 가졌었고, 소소한 것에 웃을 수 있었고, 자신보다 큰 동네를 여기저기 호기심 가득히 누벼보았을 것이다. 익숙했던 장소도 있을 것이고 역시나 지금은 낯설게 된 장소도 있을 것이다. 많은 어른들이 떠나있고, 그만큼 잊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온갖 이유로 이번 설날도 역시 짧은 방문. 먼 외국으로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도 정말 낭만적이지만 인생에 있어서 제일 낭만적일 수 있었던 나이로 돌아가는 고향으로의 복귀여행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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