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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이미지 | ||
[디아티스트매거진=권오경] 봄날은 간다. 어쩔 수 없이 봄날은 간다. 따스했던 햇살은 어느새 여름이 되어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워지고 봄날의 포근했던 기운은 장마철의 서늘한 그늘 속에서 식어버린다. 계절이 순환하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봄은 분명히 아니지만 봄은 또다시 오고 또다시 간다. 이전의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또다시 오고 또다시 떠난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랑, 그런 사람 한명쯤은 있을 것이다. 떠올리기만해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봄날 같은 사람. 지금 여기 내 곁에 없기에 더 빛나는 사람.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기다려지는 사람. 언제인지도 모를 그 날을 매일같이 기대하게 하는 그런 사람. 설령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하던 순간이 남기고 간 그 사람의 음성, 눈빛 혹은 숨소리로 얼마든지 되새길 수 있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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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보고싶어요. 은수씨, 나 그렇게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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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
한 겨울에 만난 상우와 은수는 봄이 되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만 여름이 되자 사랑의 순간들은 모두 빛바랜 사진처럼 조각나버렸다. 녹음기가 바람에 흩날리는 댓잎소리를 담아내듯이 상우는 서로의 사랑으로 부대끼던 지난 봄날의 순간을 영원히 담아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은 상우를 여름으로 내몰았고 그렇게 은수는 상우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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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 이제 뭐할꺼야? 이 일도 끝나가는데”
“무슨말이야?”
“그냥..끝나간다고”
“뭐가 끝나는데?”
“끝나간다고 내 말 못들었어?”
“뭐가 끝나가는데?”
“어후 답답해
일이 끝나간다고 뭐할거냐고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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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가 녹음기사인 만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많은 청각 이미지를 볼 수 있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산사의 풍경을 가득 채우던 고즈넉한 소리와 새벽 눈 내리는 소리, 겨울의 찬 공기에 희미하게 흔들리는 종소리, 거칠게 밀려왔다 힘없이 떠내려가는 파도 소리, 은수의 콧노래소리 그리고 보리밭에서 상우가 짓는 미소까지. 이 모든 청각 이미지들은 은수와 상우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은수가 대나무 줄기를 살짝 흔들자 공기중에 부딪히는 대나무잎 소리는 대숲 전체에 퍼져나간다. 상우또한 은수의 작은 눈짓에 그의 온 마음이 흔들리고 새벽에 소리없이 내리는 눈은 상우의 마음에 불현듯 사랑이 찾아왔다는 것을 나타내며 은수의 잠을 깨우는 종소리는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음과 같다. 거칠게 밀려왔다 힘없이 떠나가버리는 파도소리는 불현듯 찾아온 은수와의 사랑과 그녀가 떠나버리는 순간을 그리며,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상처만 영원히 남았네’라는 은수의 콧노래소리는 이 영화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청각적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녹음된 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짓는 상우의 모습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사랑으로 행복해하던 날들과 그것이 남기고 간 추억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외로움의 크기가 너무 커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별 후의 상처들까지 잘 이겨내고 있음을, 사랑이 떠나듯이 언젠가 이 이별의 상처도 아물어 사라지게 될 것임을 그의 환한 미소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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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중심이 되는 상우와 은수의 사랑이야기 말고도 부차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상우의 할머니다. 생기가득했던 푸른 봄날, 청춘靑春은 떠나가고 흰머리와 주름살만 깊게 패여있다. 떠나간 할아버지의 세월은 잊어버리고 젊은날의 초상만을 기억하는 상우의 할머니. 그들에게 있어서 봄날은 서로를 애틋히 여기며 사랑하던 순간뿐만아니라 무수한 세월 속에 숨겨진 그들의 젊은 시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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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좋았었어?”
“참 좋았댄다.”
“너네 할아버지가 할머니 이쁘다고 데리고 다니면서 옷도 사주고 화장품도 사주고 사진도 많이 찍어주고”
“근데 왜 바람폈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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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제 가요”
“할아버지랑 같이 가야지”
“할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이제 여기 없어요 할머니. 가요.
이제 정신 좀 차리세요 이제 정신 좀 차리세요”
상우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할머니에게 소리친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순식간에 달아나버리는 소리처럼, 붙잡으려 아무리 세게 움켜쥐어도 순식간에 새어나가버리는 사랑처럼 봄날은 간다.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는 이제 여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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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게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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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영원히 그 사랑을 사랑해선 안될 사람. 말없이 가는 길에 미워도 다시한번
아아아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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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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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봄이오고 은수가 왔다.
“하나도 안변했네. 기억나?”
“뭐가?”
“그냥.”
“우리 같이 있을까?”
은수의 물음에 받았던 화분을 건네고 떠나는 상우.
아웃포커스된 은수의 뒷모습은 끝까지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채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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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 ⌜봄날은 간다⌟는 20살, 25살, 30살 각각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영화라고. 정확히 5년 전, 스무살 때 이 영화를 봤다. 사랑의 권태는 커녕 사랑의 설렘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스무살의 내가 기억하는 ⌜봄날은 간다⌟는 시시했다. 사랑이 갖는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스무살에게 사랑은 곧 설렘이었고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영화 속 일상적인 장면들과 반복되는 만남은 한없이 초라했으며 은수와 상우의 사랑은 촌스러웠다. 스스로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어두운 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집어들며 ‘쪽팔려’라고 말하는 은수의 행동은 대체 무엇인지, 그토록 냉정하게 헤어지자고 말했으면서도 봄이 오면 다시 상우를 찾아가는 은수의 마음은 무엇일지, 그렇게나 ‘당했으면서도’ 돌아온 은수를 다시 끌어안는 상우의 미련한 마음은 또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봄날은 간다⌟ 가 내게 주는 인상은 확실히 다르다. 시시하게만 보였던 은수와 상우의 행동들은 어느새 익숙하게 다가왔고 초라해보였던 그들의 반복되는 만남은 초라했기에 더욱 소중했으며 촌스럽기만했던 그들의 사랑은 촌스러웠기에 더욱 아름다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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