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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가 좋다. <이터널 선샤인>

신동혁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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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2004, 미셸 공드리)

 

로맨스 영화는 일반적으로 공통된 서사의 구조를 보인다. 한 쌍의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의 기쁨을 공유하고, 사랑의 한계를 인지하고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터널 선샤인>에서 이 과정은 거꾸로 흘러간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남녀는 사랑에 빠지지만, 이윽고 진행되는 플래시 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두 남녀가 이미 과거에 사랑을 나눴던 사이라는 사실이고 쓰린 이별의 아픔을 경험한 사이라는 게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조엘(짐 캐리), 둘 사이의 연대기적 흐름 가운데에서 오프닝의 감정 공유는 두 번째 설렘이라는 것. 그리고 이 둘은 이미 첫 번째 경험했던 설렘은 모두 잊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완전히.

현재의 설렘을 잠시 뒤로하고, 영화의 서사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이별을 조명한다. 이별 과정은 굉장히 일반적이면서 판타지적이다. 이미 예전의 감정을 상실한 연인, 클레멘타인은 기억 삭제 시술을 통해서 그녀의 인생 가운데 크게 자리하던 조엘의 기억을 모조리 삭제한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연인에게서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 조엘도 역시 그녀와 똑같은 시술을 받는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 판타지스런 영화의 소재는 많은 인간의 욕망을 소묘한다. ‘너를 사랑했던 기억을 잊는다면, 아프지 않을까?’ 이 질문 속에 전제된 단 한 가지의 사실은 ‘감정은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인과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다는 생각은 참으로 쉬운 이별 방법이다. 일말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남기지 않는 깔끔한 이별 방법.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이 이별 방법의 아이러니를 꼬집는다.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줘!”라 외치는 조엘의 절규를 통해서.

<이터널 선샤인>이 로맨스 영화의 서사 구조를 역(逆)으로 활용함은 사랑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가려는 까닭이다. 조엘은 기억 삭제 시술 가운데에서 한 가지 우연으로 무의식의 가운데로 떨어진다. 긴 연애 중 마지막에 집중되어 있는 아픔을 지워내고 마침내 나타난 아름다웠던 사랑의 기억. ‘완전한 합일(合一)을 갈망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던 라깡의 말에 따라서, 자아의 융화가 한계점에 도달하기 이전의 사랑이 건네주었던 상대방의 안온함과 너와 내가 나누었던 수많았던 사랑의 일치감이 삭제되어감은 조엘에게 무한한 공허를 느끼게 만든다. 이미 긴 시간동안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자아, 정서와 육체적 동화가 이루어졌기에, 이제와서 기억을 삭제한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같았다. 그러므로 조엘의 무의식 속에서 계속 등장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클레멘타인은 사실 조엘 내부에 숨겨진 자신의 자아였으며, 끈적하게도 자신을 붙잡는 과거의 정서였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렇게 조엘의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지우려는 이와 지키고자 하는 이의 대결이 펼쳐지는 가운데에, 기억 삭제 시술 회사인 라쿠나 내부의 사연도 동시에 진행된다. 회사 동료와 사랑을 나누는 메리는 회사의 사장인 하워드에게 계속해서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결국 고백을 한다. 그런데 이 모습을 목격한 하워드의 부인은 충격적인 말을 남긴다. “너 가져, 이미 그런 것처럼.” 여기서 메리는 자신이 이미 하워드와 사랑을 나눴고, 유부남과의 아픈 사랑의 기억과 감정을 잊기 위해 기억 삭제 시술을 받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한 결국 조엘의 기억은 모두 지워진다. 시술 후 아침에 깨어난 조엘은 뭔가 알 수 없는 공허감에 빠진다. 이 공허감에 그는 성실히 다니던 회사에 아프다는 핑계로 결근하고서 무작정 바닷가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클레멘타인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또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그녀의 존재는 그에게 충만한 감정을 전달해주는 것만 같다.

조엘과 메리의 사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인력(引力)을 깨치는 건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공식이 아니라, 인간적인 인내와 결심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메리는 라쿠나를 떠나고, 라쿠나에서 기억 삭제 시술을 받은 이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이 편지는 이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 전달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 과거에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결국엔 증오했던 사람이다.’는 아이러니한 명제에 대해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망설인다. 왠지 지금 막 시작하려는 사랑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기에. 그들의 사랑은 앞으로 기쁨만 있지 않고, 결국 아픔을 포함할 것이라는 결정된 운명. 여기서 영화는 마지막 질문 앞에 놓인다. ‘우린 결국 서로를 증오할텐데, 다시 사랑해도 되는 걸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이 질문 끝에 다가오는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대답이다. “OK” 이 힘겨운 OK란 사랑 선언의 전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내 공허한 정서에 네가 한 방울 더 들어온다면 내 삶은 더 풍족해질 것이라는 의미. 그리고 네 공허한 삶에 내가 남긴 진한 발자국으로 네 삶은 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의미. 결국 마지막이 아파서, 그래서 지금의 OK가 어리석다고 여겨질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널 포기할 수 없다는 다소 멍청하지만 멋진 선언.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사랑은 꽤 많은 아이러니를 남기는 감정이다. 모든 연인들 혹은 짝사랑하는 이들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그 영원한 사랑은 영화나 소설에만 등장한다. ‘결혼’이라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이 있지않냐는 반문은 의미가 없다. 결혼조차 계약일 뿐 사랑의 영원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라깡은 사랑을 ‘다시(encore)’라 말했다. 언제나 사랑의 한계를 느끼면 사람들은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며, 영원히 그 과정은 반복된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하고 있는 사랑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시적으로나마 공유했던 상대와의 일치감은 영원히 그네들의 감정에 섞여 자리할 것이기에. 모든 사랑은 의미있다.

괜스레 2003년도에 발매된 GOD의 0%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헤어질 걸 알지만 시작하는 사랑은 숭고하지 않는가? 그리고 모든 사랑이 헤어질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는 것이기에 숭고하다. 내 사랑도, 여러분의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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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혁 기자
ziziyazizi@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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