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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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잔느, 네게 봉투를 하나 주마. 너희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란다. 그를 찾아서 이 편지를 전하거라.
시몽, 네게 봉투를 하나 주마. 너희 형에게 보내는 편지란다.
그를 찾아서 이 편지를 전하거라. 그들에게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너희에게도 편지를 줄게.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햇빛 아래에.
[디아티스트매거진=권오경]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들어가면 어쩐지 기대가 떨어지고 흔한 멜로영화일 것 같은 예감에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이 남녀간의 흔한 멜로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소름이 돋다 못해 뇌리에 강하게 번뜩이는 섬광의 전율을 느낄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실제로 원제인 ‘Incendies’는 화재, 큰불, 동란, 전란, 분노의 폭발 등을 의미한다. 첨예한 종교대립은 한 여인의 삶을 철저히 파멸해버렸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소멸한 자리에 그으름과 재만 남아 있듯이, 전쟁의 불길이 그녀에게 남긴 것은 절망적인 비밀과 역설적인 사랑의 잔재일 뿐이다.그렇다면 그녀가 품은 절망적인 비밀과 역설적인 사랑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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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이슬람-기독교간의 종교대립과 전쟁으로 뒤엉켜버린 한 여자(나왈)의 삶 그리고 이렇듯 뒤죽박죽으로 매듭지어진 어머니의 실타래를 풀어주고자 떠나야하는 아이들(잔느,시몽)로 사건은 시작된다. 1인칭 시점으로 주어지는 이 사건에 관객은 그들과 동일한 의무감을 느끼고 사건들 속으로 깊숙히 빨려들어가버린다. 맥락없는 전개는 호기심을 유발하고 어느새 영문을 몰라 답답해하면서도 스스로가 잔느, 시몽이 되어 그 탐색의 여정에 동행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한 탄생을 볼 수 있다. 증오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사랑으로부터 증오가 탄생한다. 선으로부터 악이 발생하고 악으로부터 선이 발생한다. 기독교인 나왈과 이슬람 난민청년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즉 두 남녀의 ‘사랑의 결정체’가 아부 타렉이라는 이름의 이슬람 교도관이 되어, 어머니가 어머니인 것을 모른 채 강간을 저지르는, ‘증오의 상징’으로 변화하고 마찬가지로 아부 타렉에 대한 ‘나왈의 증오’는 잔느와 시몽이라는, 또 하나의 ‘나왈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탄생하도록 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사건들은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의 부조리를 부각시키는 장치들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나왈이라는 한 여인을 중심으로 전쟁이 가져오는 피폐한 참상들을 풀어나가지만 그보다 한 층 더 확장된 영역, 즉 종교대립이 우리 인간들에게 가져오는 파괴력에 주목한다. 사랑이 증오를 낳고 증오가 사랑을 낳는 아이러니한 장치들은 결국엔 선과 악의 혼동이 자리한ㅡ어느 것도 선과 악으로 판단내릴 수 없는ㅡ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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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을린 사랑>은 불친절한 영화다. 대뜸 관객에게 알 수 없는 공간에 놓인 정체모를 소년을 던져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그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혹시나 중간부터 재생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혹은 잘못 삽입된 장면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뜬금없다. 이렇듯 갑작스럽고도 은밀히 다가오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반전을 드러내는 장면은 침묵 속에서 고요하면서도 파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지나간 뒤 3초간의 정적 후에 우리는 탄성ㅡ혹은 탄식ㅡ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이 말이 맞는지 궁금해서라도 <그을린 사랑>은 반드시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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