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라는 그의 이름은 낯설지라도, 모두들 이 테제는 한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결국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디아티스트매거진=권오경] 트뤼포는 실제로 자신이 한 말처럼 시네클럽인 클럽 드 포부르 (Club de Faubourg)에 단골로 드나들며 좋아하는 영화를 열 번 이상 보았고 꺄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éma)에 영화 평론을 기고했으며ㅡ그 시기(1954)에 그는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을 발표하고 기존의 프랑스 영화가 문학적인 경향이 강한 시나리오 작가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으며 감독이 누구든 관계없이 그것은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이지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고 혹평했다.ㅡ<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쥘과 짐> 등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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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트뤼포가 영화사상 그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점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트뤼포는 영화 속에 자기만의 세계와 영화적인 표현양식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자신의 장인의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굽힐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트뤼포에게 장인은 퉁명스럽게 직접 영화를 만들어볼 것을 권했고 그렇게 탄생한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이 바로 <400번의 구타>다.
<400번의 구타>는 누벨바그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트뤼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실제로 트뤼포가 한 인터뷰에서 회상한 그의 어머니의 모습은 영화 속의 앙트완의 어머니와 매우 유사하다. “어머니는 시끄러운 걸 못 견뎌했어요. 더 정확히 말해 어머니는 나를 못 견뎌하셨죠. 어쨌든, 나는 잠자코 있어야 했고, 독서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했지요. 나는 로 권리도, 시끄럽게 할 권리도 없이 나의 존재를 잊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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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뿐만아니라 영화 속 주인공 앙트완처럼 트뤼포는 사생아로 태어나 한동안 비밀의 아이로 길러졌으며 가족에게서 환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트뤼포는 엄격한 집안 환경과 권위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에 억눌려 자신의 유년기 환경을 묘사하길, “어린 푸르스트의 세계, 신경과민적인 프루스트의 세계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집안에는 몽페랑 가문식으로 각색된 게르망트 가문의 특징이 있었다.” 고 말하기도 했다. 앙트완 드와넬 역시 억압적인 교육환경과 권위적인 어른들의 모습에 일탈 행동을 일삼고 끊임없는 ‘바보짓’과 ‘난봉’을 부린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400번의 구타>라는 번역으로 영화가 소개되었는데 프랑스어의 숙어표현인 faire les 400 coups는 ‘많은 바보짓을 하다’ 혹은 ‘난봉을 부리다’를 의미한다. 그 어디에서도 매질이라는 의미는 찾아 볼 수 없지만 프랑스어 제목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영어에는 이러한 숙어표현이 없기에) 그대로 The 400 Blows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한국말로 번역되어 <400번의 구타>가 되어버렸다. 더욱 심각한 것은, 키노라는 영화잡지와 시중에 출시된 비디오에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명이 나와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트뤼포의 영화가 담은 내용으로 오인한다는 점이다. <400번의 구타>는 잘못된 제목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대비되는 공간들과 소재들 사이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앙트완의 말썽들(낙서->무단결석->거짓말->가출->도둑질->탈출)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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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대비되는 공간이라함은 학교, 아파트, 경찰서, 비행청소년 보호관찰소와 같은 내부의 공간과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극장, 놀이공원, 바다 등의 외부공간이다. 전자의 장소들은 권위와 처벌, 박탈, 추방, 구타, 무관심, 몰이해 등이 존재하는 억압적 공간이고 후자는 이러한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의 공간이자 해방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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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또한 대비되는 소재들이라함은 글과 이미지인데, 앙트완과 학교 친구들은 수업 중에 요염한 자세의 속옷을 입은 여인의 ‘이미지’를 돌려가며 장난치다가 구석으로 추방당하고 시험을 마저 칠 권리와 쉴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그럼에도 앙트완은 구석 벽 한자리에 낙서를 하다 그것마저 선생님께 들켜버린다. 결국 앙트완은 “나는 벽을 더럽힌다.”, “나는 불시의 운율법을 파손시킨다.” 는 문장을 직설법, 접속법, 조건법 동사로 변화해서 써야하는 숙제를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앙트완은 ‘이미지’로 인해 ’글’로써 벌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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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구글 이미지 | ||
다음에 나타나는 받아쓰기 장면에서도 한 학생은 계속해서 노트를 찢어가며 다시 쓰는 행위를 보여주는데 이 역시 글쓰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부수적으로 드러낸다. ‘글’과 앙트완의 행동이 밀접할수록 앙트완의 일탈과 말썽은 더욱 규모가 커져간다. 가출을 마음먹고 친구의 안내를 따라 간 장소또한 하필 인쇄소다. 숨어있어야하는 금지된 공간이자 억압된 공간이 글과 밀접한 인쇄소로서 상징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또한 부모에게 쓴 편지도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긴 하지만 그로써 앙트완은 타자기를 훔치게 되고 결국 더 큰 말썽과 처벌을 받게 된다. 보호관찰소에서 보낸 편지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부모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아이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글과 연관이 되어 있는 요소들이 결국은 앙트완에게 권위, 금기, 처벌로서 다가오며 억압,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징물이 된 반면, 이미지와 관련된 요소들은 환상, 행복, 자유, 동경, 해방과 관련이 있다. 첫번째로 등장하는 여자의 사진도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수업시간에 일종의 해방과 자유를 확보해주었으며 무단결석을 하고 찾아간 영화관의 이미지들은 앙트완에게 동경과 환상, 행복의 상징이다. 사진과 영화뿐만 아니라 거울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또한 동경의 이미지를 갖는다. 엄마의 애정이 결핍된 앙트완이 모성애에 대한 동경으로 엄마방에 들어와 이것저것 만지는 앙트완의 모습이 세개의 거울에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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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모성애에 대한 동경을 상징함과 동시에 어쩐지 앙트완의 소외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영화 곳곳에 앙트완의 소외와 고독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은데 학교에서 여인의 사진으로 인해 구석으로 쫓겨난 벌또한 앙트완의 소외와 단절을 나타내며, 쉬는시간이 되고 텅 빈 교실에 홀로 남은 앙트완의 모습또한 소외와 고독, 단절을 보여준다.
<400번의 구타>가 누벨바그의 서막을 알린 작품인 만큼,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 담겨있다. 기존의 것들과 습관적인 것들에 대한 반항은 랭보의 그것과 닮아있고 늘 인간은 무엇인가를 바라지만 세계는 그 소망을 좌절시킬 뿐이라는 인간이 가진 운명에 대한 부조리, 또 그것에 대한 반항은 카뮈의 그것과 닮아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앙트완이 일으키는 반항에 부정적인 시선을 갖지는 않는다. 오히려 앙트완이 그런 말썽을 부리도록 하는 부모의 무관심과 학교의 억압적인 구조에 불만을 품을 뿐이다. 즉 트뤼포의 의도대로 그의 반항이 애초부터 그가 가져온 반항이 아니라, 사회와 제도가 그를 반항아로 밀어넣은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영화에서 나타나는 400번, 그 이상의 말썽은 앙트완과 트뤼포가 보여주는 ‘구시대의 흐름’에 대한 완벽한 반항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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