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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네이버 영화] | ||
[디아티스트매거진=홍성빈]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홍상수의 계절이 되었다.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입김을 드리우는 계절이 되면 그는 어김없이 자신의 장편영화 한 편을 선물처럼 내어놓는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됐다. 그의 영화는 이제 ‘홍상수 영화’라는 고유명사로 불려도 무방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도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됐다. 1996년에 기괴하고 걸출한 데뷔작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그가 지금껏 만들어온 독창적인 세계에 어떤 결정적 순간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순간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정작 그런 것들이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의 영화를 (매년) 보고, 또 조금은 다르게 ‘느낄’ 뿐이니, 그게 참 신기하고 경이롭다.
유독 비가 오지 않았던 여름이 저물자,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처럼 홍상수가 왔다. 그가 열여덟 번째로 선보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표기하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제목만큼이나 쉽사리 잊기 힘든 감정적 여운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우연과 선택, 차이와 반복이 빚어내는 생의 한 순간을 실험적인 구조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홍상수의 2막, 3막, 아니 그러한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중대한 분기점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에 대해 이동진이 말한 ‘욕망의 4원소’(남자, 여자, 술, 침대)가 일종의 패턴처럼 반복-변주되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바로 여기에서 홍상수 영화는 다 똑같지 않느냐는 세간의 툴툴거림을 무색케 하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적 순간을 홍상수만이 만들 수 있는 ‘감동’이라 부르기로 하자. ‘감흥’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관계없다. 다만 이 순간이 홍상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빚어졌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자신을 향한 호불호를 성실과 영화적 소신만으로 맞서왔던 한 예술가에 대한 경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홍상수는 언제나 유일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사는 거예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주인공 함춘수의 이 대사처럼 그는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왔다. 사실 그가 만든 초기작에 대한 관객들의 호불호는 명확했다. 남녀의 관계에서 튕겨져 나오는 인간 본연의 욕망과 불완전함을 ‘홍상수처럼’ 파헤친 영화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자기복제, 동어반복의 혐의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욕망의 4원소가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든다. 평균으로 따진다면 1년에 한 편씩. 그가 영화를 제작한 방식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대 자본의 힘을 빌지 않는 독창적 방식으로 그는 한국 상업영화의 자장으로부터 훌쩍 벗어났다. 이른바 홍상수 월드의 시작이다. 개런티도 없고, 대본조차 촬영 당일 아침에 나오는 그의 영화에 출연을 자청하는 배우들이 늘어났다. 해외영화제에서는 그가 만드는 영화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상투성과 싸우는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얻음으로써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의 혐의에서도 벗어났다. 동시에 홍상수의 영화를 아끼는 이들이 남녀 불문, 자신의 애정을 당당히 ‘커밍아웃’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은 예술가가 되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불분명하다. 세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도, 부여받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순간도 있으며 굳이 구분하려 들지도 않는다. 모호함은 어쩌면 그만의 미덕일지 모른다. 어떤 것은 그냥 그렇게 모호한 채로 두면 된다, 고 말하는 듯한 홍상수의 영화는 너무나 합리적인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한한 방식으로 위안을 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홍상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홍상수의 영화는 홍상수라는 예술가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홍상수는 홍상수라는 ‘장르’가 된 것일까.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에 ‘생에 대한 연민’이라는 새로움마저 더했다. 바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서 말이다. 홍상수라는 장르는 대체 얼마나 더 진화할 수 있을까. 언젠가 지금의 홍상수가 틀렸고 그때의 홍상수 역시 틀렸다는 말을 듣게 될지언정, 홍상수는 여전히 홍상수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가을이면 자신의 영화를 들고 돌아올 테고, 우리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그의 영화를 보며 세상을 조금 더 ‘다르게’ 느끼곤 할 것이다. 그때도 분명 홍상수라는 장르는 경이롭고 신비로울 것이다. 우리의 부박한 생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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