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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을 걷는 남자>의 포스터. | ||
[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너 그거 해서 뭐 먹고 살래?”
시시한 레퍼토리지만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는 이런 마법같은 문장도 흔치 않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세상에서 인문학을 전공한다는 건 동정과 연민에서 때로는 ‘괘씸죄’에 해당하기도 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저러니까 인문학이나 하고 앉아 있지.”라는 말을,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돈이나 벌지 왜 굳이 인문학을?”이라는 말을 듣는 게 다반사. 거의 모든 계급을 향해 전방위 공격이 가능한 이 문장이 어른들 입에서 튀어나올 때면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저, 교직이수 합니다.” 그럼 상대방의 눈빛은 그 즉시 경멸에서 동경으로 바뀐다. 에헴, 그럼 일단 사람 구실은 하는 걸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했을 때 인문학 전공자가 공격 멘트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하나 있으니 바로 예체능 계열이다. 물론 비주얼과 압도적인 포스 탓에 함부로 공격을 하는 일은 드물지만, 막상 그런 친구가 취업을 준비한다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 “아니 왜? 어떻게 할 건데?” 문장 끄트머리에 ‘할 수는 있어?’라고도 붙이고 싶지만 친구 사이에도 예의란 것이 있는 법이라 차마 그러진 못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뭐, 인생사 피장파장 피차일반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이처럼 밑에서 세는 게 더 빠른 취업률을 자랑하는 인문학도마저 먹고 살 일을 걱정해주는 분야가 바로 예체능이다. 그리고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예체능계의 무모한 도전을 소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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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 미친 짓이야. 불가능해…하지만 난 할 거야.” | ||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줄타기에 미친 어느 아티스트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속칭 쌍둥이 빌딩) 사이에 줄을 걸어 줄타기를 했다. 끝. 무명 아티스트 필립이 줄타기에 미쳐가는 과정이 다소 빠른 호흡으로 영화의 전반기 동안 흘러가고, 그 다음부터는 오로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도전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쌍둥이 빌딩이 건설되는 동안 직접 현장조사(?)를 하고, 동지들을 모아 줄을 거는 계획을 짜고, 실제로 두 빌딩 사이의 줄을 걸어 외줄타기 쇼를 선보인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 영화는, 직접 봐야만 그 흥분과 스릴을 느낄 수 있겠다.
“이건 미친 짓이야…불가능해.
하지만 난 할 거야.”
나를 비롯하여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으리라 생각한다.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굳이 죽고 싶다면 저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많은데 왜 하필? 흔히 말하는 관심종자라는 걸까. 물론 그런 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외줄타기를 하며 줄 사이에 눕는 필립의 얼굴을 본 사람은 줄타기야말로 그의 ‘진짜’ 삶이라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생명기계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인생을 찾아낸 사람의 삶. 어쩌면 그것이 똑같은 생명 현상을 반복하는 동물과, 매순간 다른 이야기를 써내는 인간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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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연 필립은 이 빌딩에서 저 빌딩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정신병의 기원을 상징계의 어긋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아는 완벽하고 훌륭한 자기 자신을 (환상을 통해) 상정하고 유지한다. 이러한 헛된 자기통합의 노력을 가리켜 상상계라고 표현하는데,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계의 불완전성―실로 언어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으로 인해 자아는 끊임없이 혼란에 빠진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뭐지? 내 욕망은 무엇이지? 이 해답은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욕망은 나 자신이 창조해낼 수 있다. 내 욕망은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창조적인 것이다.
영화에서 필립의 행동은 일반인이 보기엔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줄타기가 무엇이길래 자기의 목숨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거는 걸까? 먹고 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필립의 무모한 행동은 이러한 욕망의 기원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영화에서는 필립의 의식주 생활에 대해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는 제목 그대로, 필립이 어떻게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걷는가에만 모든 전개과정을 쏟고 있다. 실화인 만큼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궁금하기도 한데 영화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짧은 러닝타임에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아야 한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겠지만,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영화는 ‘욕망기계로서의’ 필립을 보여준다.
“왜? 왜? 이 말이 제가 가장많이 들었던 질문중 하나죠.
왜 죽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박을 하느냐고 말이에요.
저는 그래서 죽음이란 단어를 참 싫어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말을 좋아하죠.
삶, 제게 있어서 이것은 삶 그자체입니다.”
생활의 도전이 아닌 욕망의 도전으로서의 외줄타기. 필립은 바로 그런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느낀다. 외줄은 불안정한 공간이자 욕망의 성공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빌딩 사이의 아주 얇은 외줄 위의 공간은 필립이 상징계의 어긋남과 상상계의 환상을 극복하는 공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언제든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느낀다. 실로 필립에게 외줄 위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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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립은 외줄 위에서 평안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그곳은 욕망을 실현하는 장소이기에. | ||
필립의 도전과 성공은 불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창조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줌을 잘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어쩌면 상업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밥보다 예술이 좋다는 사람에게 도리어 위로를 준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영화를 통해 그리고 필립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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