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김혁준]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이터널 선샤인이 그랬고 개봉 10주년을 맞아 재개봉을 한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이미 널리고 널렸으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와닿는 것만큼은 다른 글이나 마음에 비해 배가되고, 전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시기가 찾아온다. 음악이나 영화가 어느 것도 전달해주지 못할 때. 아무리 듣거나 보아도 감흥이 없고 타성에 젖은 것 마냥 새롭지 않다. 다 예정된 일이었고 어느 것 하나 예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매일매일이 똑같고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빌려올 정도로 이러한 상태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이만한 게 없다. 그래야만 표현의 진부함에 상황 속 지루함이 느껴질 테니. 더군다나 이러한 상태는 바로 느껴지지 않는다. 가랑비에 젖는 것처럼 서서히 다가오다가 흠뻑 젖어있는 걸 발견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감정은 엄습해온다.
모든 예술가는 멜랑콜리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멜랑콜리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예술가는 아니다. 감독은 멜랑콜리를 통해 일반인들의 멜랑콜리를 건드린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타성에 젖은 상태에서, 다르게 말하면 우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분명 많은 찬사를 받음에 있어 합당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봄에 있어서 그토록 대단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였고 훌쩍이는 주변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스크린을 바라 봐야만 했다. 영화가 요즘 나의 이 기질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굳이 이터널 선샤인을 찾아 보았고 결과적으로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 영화가 못나서가 아니라 이 멜랑콜리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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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터널 선샤인 ⓒ네이버 영화 | ||
멜랑콜리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들을 멜랑콜리함으로 몰고가는 이 멜랑콜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사람은 사랑 속에서 태어나며 그 순간 죽음을 선고 받는다. 사람은 죽기 위해 살아가며 그 속에서 자유롭고 사랑을 한다. 멜랑콜리는 사랑과 죽음(이별)을 겪어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사랑을 통해 자기 내부에 잉태된 미래의 타자에게 자신의 피와 양분을 공급하면서 얻게 되는 고통, 흥분, 일렁임, 고독, 우울이다. 사랑은 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것을 낳는 행위이고 새로운 타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이 미래의 타자는 우리는 누군지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알 수 없다. 그저 사랑이 계속된 사랑을 하기 위해 보낸 사랑의 전령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사랑은 누차 말했듯 자기 사랑이 아니고 온전한 타자 사랑이어야 하며,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의 모습이나 마음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타자를 내 속으로 받아들여 나와 동일시 하고 내 안의 타자와 나를 키워감과 동시에 내 속에서 커진 타자로, 결국에는 타자에게 동화되는 즉 자신이 이화(異化)되어야 하는 일이다. 사랑에서 시작하는 멜랑콜리는 사랑이 깊을수록, 타자에게 이화되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뜻하므로 사랑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더욱이 타자는 언제나 타자로서 거리, 부재, 이별, 죽음의 지대에 있기 때문에 사랑은 언제나 애절한 그리움으로 남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해야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멜랑콜리는 이유 없이 슬프다. 슬픔의 원인이 우울함의 원인이 무의식 깊숙이 숨어있어 까닭 모를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다. 멜랑콜리는 또한 묘사하기 어렵다. 말에 묻어 있는 감정을 느껴야만 겨우 그 진실을 엿볼 수 밖에 없다. 멜랑콜리를 느끼는 사람들은 결국 막연하지만 검질긴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극단적인 감정들의 급격한 전환을 느낄 수 있다.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극도의 권태로 이어진다든지, 터질 듯한 마음이 갑자기 공허로 바뀐다든지. 이는 곧 자기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기 상실이 아닌, 깊이 사랑했던 대상을 상실함이 자기 상실로 이루어져 주위의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고 자기마저 무너져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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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터널 선샤인 ⓒ네이버 영화 | ||
되감기
이러한 연유로 나는 되감기의 미학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인정하고, 그간에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되감는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최근기억부터 지워지는 것처럼, 이 기억만큼은 지우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되감는 것으로 우리는 감정에 얽매이고 매몰되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멜랑콜리커가 될 수 있다.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과거를 알고나서 이제는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엘이 차 안에서 울면서 그의 기억이 녹음된 테이프를 집어 던짐으로 인해 다시 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다. 종국에는 애착이 집착으로 변해버려 그들의 행복했던 과거마저 모두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만남과 이별, 기쁨과 고통은 사랑의 불가피한 조건들이다. 비극적인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이미 이별을 전제하는 비극적인 하지만 영광인 운명이다. 나는 되감기를 통해 다시 조금씩 감정이 돌아왔고 왜 우울한지 조금은 알아가는 중이다. 여전히, 앞으로 계속 “너를 이해한다”, “너를 앞으로도 이해할 것”이라 말할 것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음은 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기 때문에.
참고 문헌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문학동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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