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이라도 용서해주세요. 니체가 철학은 자기고백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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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urt Cobain of NIRVANA | ||
커트 코베인이 자살을 한 이유는 – 대중적이길 바라지 않던 그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환영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성을 버리기 위해 그는 점점 더 난해하게 작곡을 했지만, 작곡할수록 대중들은 열광했다. 결국 행복을 만들던 음악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자 커트 코베인은 산탄총으로 그의 머리를 쐈다. 사람들은 산산이 흩어 진 그의 머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던 무언가가 어느 날 등을 돌려 자신을 불행으로 밀어 넣었을 때, 인간의 고통과 혼란을 가장 잘 보여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정되면 다시 불안해지고 싶고, 불안해지면 다시 안정이 되고 싶어. 생각해봤어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지. 그런데 가져도 왜 계속 배가 고프지.”
박진영의 ‘놀 만큼 놀아봤어.’를 듣는 이유는 순전히 이 가사 때문이다. 나는 가사에 나오는 대로 예쁜 여자, 섹시한 여자와 함께 즐길 만큼 즐겨보지도 않았고 제목처럼 놀 만큼 놀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 한 구절만큼은, 내가 내 자신에게 던지려는 질문을 명쾌하게 던져준다는 이유만으로 공감은커녕 내심 재수 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노래를 애청곡으로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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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영 ‘놀 만큼 놀아봤어’ MV | ||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취업을 할 수 있을지 막연한 걱정에 빠졌다. 그러다가 문득 남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일에 무작정 매달리기보다는, 조금 성공하기 힘들어 보여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빠져드는 게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철학 복수전공을 시작했고 여러 곳에 글을 배우러 다녔다. 한 학기가 지나 뒤돌아보니 느린 속도였지만 관심도 없는 일에 무작정 끌려가던 시절보다는 훨씬 빠른 성장을 이뤄내고 있어 행복했다.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 내 성장을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혹시라도 슬럼프가 오면 사람들이 내 글을 알아봐줄까, 밑도 보이지 않는 불안감에 손에 잡히는 대외활동들을 모조리 참여했다. 글을 쓰는 곳이 네 곳으로 늘어나자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만했다. 단순히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 같던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마음에 설렜다. 그것도 오랫동안 속으로 꽁꽁 싸매온 신념인 ‘세상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를 여러 예술 작품에 대한 리뷰들에 녹여 풀어나가는 날에는 잠들기 전에 내 글이 올라가지는 않았는지 몇 번씩 확인하다가 잠들었다. 가족들에게 걱정거리였던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내 글이 홈페이지의 헤드로 올라가 누군가가 스크랩해갔을 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SNS를 켜곤 했다.
그런데 문득, 나를 비롯한 여러분이 바빠서 행복한지 물어보고 싶다.
며칠 밤을 새서 원고를 보내고 다음날 하루 종일 집에서 잠만 자다가 가족들을 보지 못하고 오후에 학교로 나설 때, 외로워하는 친구 앞에서 노트북을 꺼내 마감 시간에 맞춰 글을 쓸 때, 옆에서 장난치는 여자 친구를 두고 카페에서 과제 때문에 급하게 책을 읽을 때, 글로 인한 행복은 채워지고 있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적어도 이 상태로 가면 삼십대 까지는 행복하겠지만 사십대부터는 불행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왠지 오십대의 내 모습은 글로 인해 행복해졌다가 글로 인해 불행해할 내 모습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룬 성과는 적었지만 그 느린 성장이나마 행복해 쩔쩔 매었다. 하지만 이 순수한 글에 대한 행복이 나의 전부를 채우는 순간, 나는 글자로만 남는 사람이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김장훈이라는 뮤지션의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TV에서 했던 한 마디는 마음에 들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그동안 음악을 하면서 주위 가족들을 고생시키고 보니) 음악은 결국 휴머니즘인데, 가족도 못 지키는 놈이 무슨 음악을 하나 싶더라고요.”
이쯤에서 박진영의 노래 후반부 가사가 오버랩 된다.
“이젠 사랑을 하고 싶어. 혼자 집에 오는 길이 싫어. 이런 날 어서 구원해줘. 꺼지지 않을 음식으로 날 배불려줘.”
그리고 다시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무리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도 그것이 당신을 뒤덮어버렸을 때, 당신은 몇 년이나 행복해할 수 있나요?
고대 그리스의 한 일타 강사가 인간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행복은 완전한 자기완성을 말한다. 외부의 기준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모습 본연 그대로 존재하는 완전함이 행복이 그가 말하는 ‘행복’이었다. 아무리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도, 그것이 우리의 전부를 뒤덮어버려 우리가 완전한 우리의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물어보고 싶다. 우리가 행복한지에 대해서. 그것에 대한 답이 ‘어중간하게 살자.’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대한 조각이 당신에게서 정확히 몇 퍼센트를 차지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준다면, 그것만큼 오늘 밤 내가 던진 질문의 숨은 의도를 잘 파악한 것도 없을 것이다. 끝으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 가사가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예전엔 뛰었었지, 아주 빠르게. 지금은 그보다 더 빨리 걸을 수 있어.”
– 3호선 버터플라이 ‘스물아홉 문득’ 중
[디아티스트매거진=주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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