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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듯전시보기] 안국, 편안한 나라

조성철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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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ist 매거진=조성철] 작년에 돌아가신 필자의 할아버지는 화가셨다.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직분을 마치신후에는 항상 좋아라 하셨던 그림에 매진하셨는데, 그 어느 때 보다 삶을 즐거워하셨다. 명절 때마다 어린 손자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주시며 인생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는 할아버지는 이제 안 계시지만, 집에 남은 할아버지의 매화는 마음속에 그 이상의 큰 위안으로 자리 잡았다. 경복궁 옆 안국역의 한 면을 빼곡히 채웠던 할아버지의 매화들은 이제 그곳에 없지만, 그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할아버지에게 오늘도 전시회 간다는 인사를 드린 후, 안국역을 나서는 도중, 우연히 역의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安國, 편안한 나라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중인 안규철 미술가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나라’ 이다. 사랑의 대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나 생물학적으로 보나 아쉬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사유이다. 열렬히 혹은 오랫동안 좋아했던 대상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데에 대한 박탈감과 슬픔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었던 기억이기에, 전시의 제목을 본 순간부터 이후에 머리가 복잡해져있을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전시는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시자의 권한으로 이제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대상’들을 눈앞에 나열하며 기억의 미화와 왜곡을 강요하기 보다는, 관객들이 자유롭게 그 대상들을 회고할 수 있는 무대만 준비해 둘 뿐 개입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게 무엇이든지 간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해서 사랑의 대상이 안 될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전시실에는 총 8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8개의 작품은 누구 하나 튀지 않았고, 하나의 공간 속에서 부재의 대상을 기억하는 방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중 단연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식물의 시간 2’였다.

   
 

모빌이다. 거대한 모빌.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는 실제의 모빌. 한 점의 무게 중심으로 완벽하게 균형 잡혔지만, 매순간 조금씩 모두가 변하고, 그렇기에 조금씩 양보하며 같이 자라나는 모빌. 식물들이 자라나는 속도에는 미세하지만 차이가 있기에 아마 전시 처음의 모습과 전시가 끝날 때쯤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미동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호흡하는 유기물들은 서로를 인식하며 자신을 온전히 서로에게 맡기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굳건히 나라를 유지하는 식물들에게서, 사랑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년 전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미술에 반해 무작정 찾아간 전시회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칼더의 모빌을 주제로 한 전시었는데, 이어지는 진중권씨의 설명회에서 칼더의 모빌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미학 단어들이 난무하는 설명 속에서 스스로가 미술이라는 큰 우주 속에 지나다니는 수많은 파편중 하나정도로 느껴졌고, 드디어 내 자신이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다.

이에 반해 2년 후의 나는 조금 민망할 정도로 미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업을 삼아야겠다고 뜻이 선 이후에는, 모든 전시회가 학교가 되었고, 작품들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부러 어려운 책을 찾아보았다. 마치 학교 국어시험에 출제되는 시에 모든 설명을 빼곡히 적어 두어야 성이 풀리는 우등생처럼, 어느 순간부터 숨겨진 의미를 즐기기 보다는 의미부여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길가다가 어제 본 책에서 나온 작품이 나오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그 때가 기억이 났고, 웃음이 났다.

   
 

1,000명의 책이라는 필경프로젝트가 지금 이 전시와 함께 진행 중이다. 전시가 진행되는 5개월 동안 카프카의 ‘성’ 또는 이상의 ‘날개’를 1,000명의 지원자들이 고립된 공간에서 필사하도록 하고, 그 모습 자체를 관객이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살아 움직이는 전시를 만들었다. 1,000명의 정성을 담아내는 이 과정을 바라보는 와중에 필자에게 하나의 작은 행운이 찾아왔다. 마침 그 시간대에 필사 작업을 신청했던 지원자가 도착하지 않았고, 근처에 있던 안내자 분이 혼자 전시를 관람하던 내게 작업에 참여할 의사를 물어봐 주셨다. 예상치도 못한 행운에 더듬거렸지만 어느새 나는 필사의 방에 들어가 있었고, 처음 잡아보는 만년필로 삐뚤빼뚤 카프카의 ‘성’을 필사하고 있었다.

필사의 방에 들어가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원고지를 뒤집어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각양각색의 필체들이었다. 정성을 다해 써내려간 원고지 위에는 모든 필체가 달랐고, 필체만 보았을 뿐인데 어떤 사람들일지 상상이 갔다. 사실 필자는 글씨를 잘 못 쓰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항상 작게 글씨를 쓰던 탓에 조금만 마음이 급해지거나 격한 마음에 글씨를 쓰면 금세 글씨에서부터 티가 난다. 소중한 사람과 다툴 때에는 더더욱 표정관리가 잘 안 되는 것처럼, 필자의 필체는 감정을 담으면 자주 무너졌다. 그런 나를 아셨던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항상 글자를 크게 쓰는 것을 강조하셨다. 두 분다 워낙 명필이셨기에 부모님 말만 잘 들었으면 훨씬 더 나은 필체로 내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 더더욱 글씨를 크게 쓰지 않으려 했었고, 글씨를 크게 쓰지 않아도 잘 쓸 수 있다고 아버지한테 말하며 부족한 글씨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내 자신이 기억이 났다. 꾹꾹 한자 한자 원고지에 옮겨 쓰는 도중에도 옆에서 글씨좀 크게 쓰라고 호통 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고, 자연스럽게 글씨 크기가 커졌다.

   
 

안규철 미술가는 이 전시에 앞서, ‘이 전시는 관객이 채워 넣어야 할 빈칸들로 가득한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갈수록 개성이 강해지는 현대미술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가지만, 오늘의 전시는 이기적인 창조자의 모습을 지우고 남은 그 공간에 대중을 초대한다. 오늘의 전시는 지금까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보이지 않는 사랑’의 기억에 우리를 빠지게 했고,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다녀온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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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철
sungcholc@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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