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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네이버 영화 | ||
[디아티스트매거진=김범진]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좀 된 작품이다. 국내에 개봉한 것은 2012년 7월이니, 3년도 더 지났다. 그래도 600쪽이 넘는(번역서 기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수작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장면을 섬세하게 그려주어야 하는데 우선 소설 ‘케빈에 대하여’는 주인공 ‘에바’가 서술하는 형식이라 시점의 특성상 묘사의 기능은 덜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부족한 장면성은 영화가 명확하게 획득하였고, 그래서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절제된 언어와 파열된 감정들이 조화롭게 그려져서 확실한 인상을 가진다.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목은 소설과 영화 모두 ‘We Need to Talk about Kevin’으로 비슷하면서도 참 다르다. 한국어에서는 주어가 생략되어도 대충 의미가 통하고 생략에 의한 시적인 성격이 부여되어 영어 제목과 한글 제목의 느낌 차이가 생긴다. 원제목에서는 ‘We’와 ‘Kevin’의 무게감이 비슷해서 주인공인 ‘에바’를 강조한다. 실질적으로 영화 자체가 케빈에 대해 에바가 이야기하는 내용이지만 ‘We’는 단지 ‘에바’만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독자/관객을 포괄하는 큰 개념으로 보는 것이 넓게 이해하기에 좋다.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에바’는 성장해가는 ‘케빈’을 관찰하는 완성된 평면적 인물이지만 ‘We’의 입장에서 에바와 함께 인물의 평면에 어떻게 의문의 축이 더해져 입체가 되어가는지 따라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맞다. 영화는 줄곧 케빈에 대하여 말한다. 정확하게는 케빈에 대하여 말하는 에바를 따라간다. 자유로운 여행객이었고 성공한 사업가였던 에바는 케빈을 낳고 나서 발이 묶인다. 남편을 사랑했지만 남편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고,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자아였다. 그런 그녀에게 자식이, 케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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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네이버 영화 | ||
에바에게 케빈은 원하던 자식은 아니었다. 어린 케빈에게 에바는 어머니가 아닌 타자의 태도를 취한다. 자식이지만 원하지 않았다는 점, 바로 이 부분이 ‘케빈에 대하여’를 살아 숨쉬게 하는 문제의식이다. 영화가 관객의 안에서 생명력을 얻는 방법은 다양한데 이 영화는 관객에게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에바는 케빈을 본능적인 모성으로 대하지 않고 모성이라면 으레 이러하겠지 하며 어머니를 연기하는데, 이를 통해 ‘에바’라는 인물이 모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성에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다양한 강요와 질문들에 대한 모범답안들이 모여 이루어지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개인과 약속에 대한 신뢰성이 보장되는 사회와의 갈등은 그 신뢰성이라는 것의 근본의 배반가능성이 내재되어 당연하다. 개인으로서의 ‘에바’는 일종의 완성된 독립적인 자아이며 사회성을 배제하고도 하나의 완벽한 우주와 같은데, 그런 그녀(그)가 신뢰 또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 이전의 모성, 즉 유전자와 물리적인 신체의 연결로 구성되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생명연결관계에 의한 타인과의 접촉을 마주하는 과정이 에바가 케빈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에바는 궁금하다.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내 아이인지‘는 나중 문제이고 ’나는 저(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바란다기보다는 어머니를 잘 연기하고 싶다. 완벽한 자아에는 사회적 역할의 수행도 포함되기에 그녀는 사회적인 어머니 역할을 해 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쪽의 세계에서 케빈은 그녀에게 하나의 도전과제와 같다. 역할 수행에 있어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설정 아래에서 그녀는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러나 에바가 눈물을 흘리는가? 에바는 케빈과 함께했던 시간을 복기하며 언제부터 자신이 어머니였는지를 찾고자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의미 없는 시간들에 입혀진 추억들일 뿐이고 남은 것은 모성이 거세된 자신일 뿐이다.
모성은 그래서 무엇인가? 케빈에게 모성이란 박탈당한 것이다. 당연하게 제공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세상에 나왔으나 없었기에 바로 그걸 찾고자 악의로 번역되는 모든 노력을 투자하게 하는 대상이다. 한편 에바는 당황스럽다. 케빈이 표면적으로는 사악하지만 그는 그냥 전적으로 인간적인 인물이다. ‘인간’이라면 기대되는 인간성과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있을 어머니의 사랑이 그에겐 없었기에 케빈은 단지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어머니의 사랑을 간절하게, 조금은 비틀린 감정으로 원할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바에겐 의무가 있지만 제공할 모성이 없다. 그런 것 없이도 살아가는 데에 문제가 없었고(자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어쩌다 보니 케빈을 낳았지만 그녀에겐 기생이 공생으로 바뀌는 과정에 불과했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그녀에게, 대강의 사회성은 어느 정도의 연기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때로는 성공까지도 가져다주기에 보다 본질적인 타자와의 연결을 의미하는 모성은 아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모성은 그냥 그 정도였다. 어느 날 문득 케빈을 낳고, 기르다가 사건이 닥치고 나니 없었구나 하고 느낄 만큼 살면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케빈을 낳은 뒤 지옥은 에바의 뒷 배경에 있던 것이 아니라, 보다 케빈에게 가까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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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네이버 영화 | ||
에바는 분명하게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에바에게 있어 결혼은 깊은 영혼의 공명이 아닌 단순한 끌림 수준이었고, 자식을 원하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 욕구가 없는 매우 개인적인 인물이다. 케빈이 없었다면 극중 그녀는 신에 가까운 이데아로 기능했을 것이다. 케빈과 에바의 갈등은 따라서 자아의 완전무결성을 추구하는 1인의 본성과 혈연의 사랑으로 점철되는 타자와의 모든 관계의 형태적 요약이 대립하는 양상이다. 에바와 케빈 모두 인물의 껍데기를 벗겨 주면 그렇게 관념끼리만 마주한다. 영화는 ‘We’에게 질문한다. 모성이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은 어디인가?
알기 어렵다. 질문의 치명성은 해답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가 아니고 어떤 답변을 하더라도 반박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인간 모두가 부모-자식이라는 관계의 한 쪽 또는 양 쪽에 포함되는데 그걸 벗어나지 않는 이상 주관적이지 않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인간 정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인간을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어쨌든 근본적인 사회성을 제3의 시각에서 평가할 수 없다. 인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로 인한 답변의 불가는 때로는 절망을 가져오기도 한다.
‘케빈에 대하여’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단순하게 ‘모성’의 탐구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엮어내는 방식과 각도에 따라 다양해질 수 있다.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본다면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우리를 맞이하는데, 소설과 영화 모두 말미에서 케빈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결국 감독도 원작자도 그래 봐야 인간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케빈은 에바에게, 그리고 ‘케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의문을 던져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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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www.lens-views.com | ||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소설에 없던 내용이 나온다. ‘에바’는 스페인 토마토 축제에서 기이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좋게 봐도 축제를 즐기는 얼굴은 못 된다. 빨간색이 강조되는 씬은 크게 세 부분인데 이곳 토마토 축제 장면, 마트에서캠벨 토마토 통조림 진열대 장면(영화 소개글에 자주 등장하는), 그리고 사건 이후 에바의 집에 뿌려진 빨간 페인트를 비추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수많은 아날로지가 아나토미가 되어가는 영화 읽기는 자기침잠의 지름길이겠으나 이 부분을 분노적 자기파괴와 연결시킨다면 아마 전반적인 에바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장면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국 에바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녀의 잘못은 없다. 소설책 뒤에는 ‘소시오패스와 가족’이라는 소재를 언급했는데, 따져 보면 ‘케빈’보다 ‘에바’가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하지만 소시오패스의 행위에는 악의가 있다기보다는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이다.
따져보면 ‘케빈’이 아닌 ‘에바’가 따지고 보면 악하다는 데에서 소름이 한 번 돋을 법하고, 사실 그 누구도 죄는 없다는 데에서 두 번 그럴 만하다. 다들 그저 실수들을 반복하고 배워가는 중일뿐이다. 학습의 길을 걷다 보면 자아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필수적이고, 예민한 인물에게 지속적인 생채기는 위의 장면들처럼 잔인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또는 희망적인 것은 이전보다 나은 현재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에바가 모성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황급하게 끝난다. 열린 결말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모성에 대한 탐구 끝에 어떠한 대답을 내놓고자 하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답변을 유기하고 질문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몸체와 결말이 잘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한다. 표면적인 관계는 점점 늘어나는데, 진짜 관계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지 한 번 돌아본 적이 있냐고.
영화든 소설이든 좋은 작품은 그 피복을 벗기면 반짝이는 도선(導線)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실질적으로 피복은 기술적인 구축에 의해 정교함이 평가되지만 그것이 감싸는 본질의 치명성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어떤 점을 돌아보고 생각하게 하는지, 좁게 말하자면 어떤 의문을 들게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모두가 잘 알 듯 개별적인 개인의 차이만큼 다양한 각자의 급소가 있으므로 보편적으로 좋다고 평가되기 위해서는 겨냥하는 상대방 집단에게 경제적으로 최대의 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복잡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을 녹여낸 영화는 심연을 찾아내기가 까다로워 상업적으로 성공하기가 어렵다. ‘케빈에 대하여’도 그렇긴 하나, 인간에게 보편적인 ‘모성’을 말해서 작은 돌파구를 만들었다.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시공간적 경험들을 하고 감정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진다. 영화를 진하게 보고 나면 어떤 제시된 틀을 거쳐 일정한 경험과 감정을 양 손에 들고 나올 수 있다. 외식에 비유하면 조금 적절할까. 이 영화가 실존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쥐어 주는 힘들고 피곤한 영화인 것은 맞다. 그래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수작으로 꼽으니,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를 두 번 보아도 괜찮은 영화의 반열에 올려도 좋을 것이다. 공감한다면 작은 부탁을 하는 바인데, 에바의 입장에서 영화를 따라가 보자. 절망에 붙일 수 있는 자신만의 수식어가 하나 더 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에바’와 ‘케빈’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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