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이상석] 충주는 예부터 역사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기로 알려져 있다. 충주 시민들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데, 여행 코스는 어렵지 않다. 탄금대에서 시작해서 중앙탑과 중원고구려비는 남한강을 끼고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탑 앞에는 충주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충주의 역사를 한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충주의 명물인 막국수를 즐길 수 있는 식당들도 탄금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요소들도 충분하다.
충주는 다양한 길목이 지나가는 곳이다. 특히나, 물길과 물길이 모여드는 곳이 바로 충주였기 때문에 조운 중심의 교통이 활발했던 삼국시대에는 요충지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당시에는 남한강이 지나는 충주를 차지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했다. 또한 수안보 쪽으로 빠지는 길은 문경으로 이어지고, 경상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탄금대는 충주하면 동시에 연상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소나무가 우거진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는데, 악성 우륵 선생의 추모비부터 탄금대비, 탄금정, 신립장군 전적비, 삼국시대 토성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소나무 길을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면 차례차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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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탄금대 | ||
우선, 탄금대라는 이름은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탔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륵은 가약국의 음악가였는데, 쇠락해가는 가야국을 떠나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진흥왕 시절이었는데, 진흥왕은 이들을 국원성(지금의 충주)에 살게 하고 법지, 만덕, 계고 3명을 보내 음악을 배우게 했다. 열심히 배우던 세 사람은 우륵이 만든 열두 곡의 곡조가 번거롭다 하여 다섯 곡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음악은 종교만큼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 구성원의 일체감과 결속력을 강화시켜주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진흥왕이 우륵을 받아들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우륵의 이야기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나게 되면 나라가 바뀌어 있다. 바로 조선. 때는 1592년으로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임진왜란이 있던 해에 탄금대는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한다. 탄금대 전투로서. <명장>이라는 영화에도 잠시 나왔던 장면으로 탄금대는 무장 신립을 비롯한 조선의 군대가 왜적에게 크게 패한 뼈아픈 전적지이다. 사실, 신립은 북방 유목민을 상대로 이름을 날리던 명장수였다.
선조는 신립이라는 믿음직한 카드를 써서 새재를 넘보는 왜적을 상대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충주는 경상도에서 넘어오는 길목이었다. 허나 그 길목은 상당히 험난하기로 유명했다. 정부 관료들과 장수들은 이곳에 매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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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묘사된 탄금대 전투 | ||
하지만 새재와 충주 일대의 형세를 살핀 신립은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배수의 진,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전쟁 용어다. 신립은 충주들판으로 끌어들여 기병으로 물리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립의 장기 중의 장기, 기병전이었다.
신립의 이러한 판단에는 많은 이유가 숨어 있었다. 본래, 신립은 북방에서 활약하던 장수였기 때문에 기병전에 능했다. 그리고 이미 왜적들은 새재 앞까지 들이닥쳐 있었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동안 전쟁을 겪지 못한 조선은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가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오합지졸들로 매복을 한다?! 신립은 승산이 없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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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금대 전투를 이끈 장군 신립 | ||
허나, 신립의 판단은 틀렸다. 전국시대를 겪은 왜적들의 전술은 상당했고, 신립의 군대를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은 충주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당해야 했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마지막 힘이 다하자 강물에 몸을 던졌다. 신립의 패배로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고, 충주가 뚫리자 서울도 금방 함락되었다.
사실 유리한 새재를 두고 어찌 탄금대 진을 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설들이 전해져 온다. 그 때 당시의 판단과 패배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것 같다. 처녀 원귀의 꼬임에 넘어갔다는 전설부터 다양한 이야기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또 다시 400년이 흘러간다. 다시금 등장하는 탄금대는 역시나 슬픈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탄금대는 남한군이 선전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낸 방패역할을 해낸 것이다. 물론, 이 때는 임진왜란 당시와는 달리 승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기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공간 안에서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며 살았던 우리들이 미국과 소련, 그리고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 반으로 나뉜 뒤, 심지어 동족을 살해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한반도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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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전쟁으로 희생된 분들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 | ||
필자는 대학교 3학년 때 가족들을 인터뷰해서 역사 현장을 담아내는 과제를 한 경험이 있었다. 남북 전쟁 당시 남한군, 북한군들은 총구를 하늘에 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제발 물러가주길, 도망가주길, 그리고 살아주길 희망하는 총소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551년 우륵은 탄금대에 앉아 남한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야의 곡조는 신라에 흡수되고, 자신은 신라로 망명한 상태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가야금을 타지는 못했을 것이다.
1592년 신립은 탄금대에 앉아 남한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올라오는 왜적들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걱정하고, 가족들을 걱정했을 것이다.
1950년 6월 남북한군은 탄금대에 앉아 남한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로를 바라보며 지긋지긋한 슬픈 역사가 끝나길,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걱정하고, 가족을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2015년 여러분들은 탄금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혹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탄금대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보았지만, 슬픈 이야기들이 많다. 하지만 몇몇 굵직한 역사의 이야기들이 슬픈 것이다. 긴 시간 속에서 탄금대는 누군가에게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고,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지이기도 했다. 하다못해 날씨 좋은 날 탄금대에서 셀카를 찍는 필자에게는 더 없이 행복한 기억이 될테니 말이다.
앞으로 탄금대에는 어떠한 역사들이 스쳐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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