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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 계절이 주는 먹먹함 <만추>

신동혁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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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만추>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만추>(2011, 김태용)

만추(晩秋), 늦가을…. 이 계절이 건네주는 감정은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살아가면서 각자 경험한 가을의 횟수는 다를지 몰라도, 그 먹먹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유치원 때에 느꼈던 먹먹함의 이유는 내 키가 지난 몇 달 간 꽤 많이 자랐음에도, 자신에 닿지 못하게 더욱 높아져 버린 가을 하늘에 대한 원망이었고, 초등학생 때는 1년 동안 꽤 친해진 친구들과 이제 겨울이 되면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던 짝사랑의 그녀가 조금씩 추워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에, 그리고 지금은 올려다 본 하늘만큼 높은 현실의 벽 앞에 서 있는 내 안쓰러운 모습 탓에 먹먹하다. 그러므로 ‘가을을 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먹먹함이 불러오는, 안개처럼 잔뜩 어둡게 끼어버린 미래에의 불안감을 의미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애나에게 시계를 건네는 훈.

<만추>의 주인공 애나(탕웨이)와 훈(현빈)은 영화 제목과도 같은 ‘만추’에 조우한다. 지갑을 잃어버린 훈에게 애나가 30달러를 빌려주면서, 그리고 훈은 담보인 것 마냥 애나에게 시계를 건네주면서 관계는 시작된다. 시계와 돈. 마치 시간을 돈 주고 사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장면 속의 두 사람은 각자의 사연을 함께 담고 ‘시애틀’로 떠난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너른 풍경을 바라보는 여인,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72시간 동안 외출을 허락 받은 교도소에 수용된 죄인이다. 그녀는 7년 전 자신의 남편을 살해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남편보다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사랑하기에 저지른 일이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는 이미 다른 여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애나는 누구의 보살핌도 바라지 못하는, 살인자로 낙인찍힌 자신의 남은 생에 대해 교도소의 벽만큼이나 높다란 먹먹함을 느낀다.

그녀의 건너편 자리에 앉은 남자, 훈은 맥락상 여자들에게 웃음과 몸을 팔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고객이었던 여인의 남편에게 죽임을 협박받으며 쫓김을 당한다. 그는 전화로 이 상황을 걱정하는 친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의 굳어버린 표정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그의 밝지 않은 미래를 소묘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먹먹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녀는 배경의 계절 ‘만추’와 결합하며 흔히들 느끼곤하는 ‘가을 타는’ 형상을 지닌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터미널에서 조우하는 애나와 훈.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 안, 시계와 돈으로 연결된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잠깐의 자유에 잊었던 과거를 기억하며 앞으로의 먹먹함을 지워보려 애쓰는 애나와 한 여인으로 비롯된 불안을 단지 ‘외국 손님’에 대한 영업으로 떨쳐내려는 훈의 대화는 지극히 일방향적이다. 이는 과거의 장소로 향하는 애나의 심리가 미래에 대한 먹먹함보단 과거의 설렘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이내 도착한 과거의 장소. 그곳에서 애나가 발견하는 현재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위로가 가득한 과거의 안온한 공간이 아니라, 죽은 어머니의 재산에만 눈이 먼 형제들이고, 과거 감정을 나눴던 남자의 변명뿐이다. 누구도 그녀의 현재에는 관심이 없으며, 힘들었을 그녀를 안아주는 사람이 없다. 이윽고 찾아오는 외로움의 절정.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품었을 기대와 상반되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실망한 애나는 이 지극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자연스레 다시금 훈과 헤어졌던 ‘버스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깥이 풍기는 먹먹함은 교도소와 다르지 않았기에, 다시 교도소로 돌아갈지 망설이던 애나. 그리고 그녀와 조우하는 훈. 멀뚱히 서서 웃고 있는 그에게 애나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같이 자자”라는 다소 불손한 의도의 말이다. 이는 과거의 인물들에게 바랄 수 없는, 7년 간 외로운 감옥에서 힘들었을 자신에 대한 위로의 갈망이다. 하지만 함께 들어선 모텔 객실 안에서 쾌락을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은 이 쾌락이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 소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러므로 한순간 쾌락을 즐기기에 완벽한 몸과 얼굴을 가진 훈을 거세게 밀어내는 애나의 심경은 일시성의 즐거움에 대한 선택보단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인간으로서 사랑받는 삶에 대한 선택을 향한다. 그렇게 둘은 날 것의 몸을 꽁꽁 싸매고 비가 그친 거리로 나가 걷는다. 그들의 발걸음엔 정처가 없다. 다만 오랜만인 식당으로, 놀이동산으로, 쇼핑몰로 어슬렁 걸어 다닐 뿐이다. 마치 어두운 어느 날 밤의 꿈처럼 따뜻하게.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애나를 바라보는 훈.

그 끊임없는 걸음 가운데에서 할 줄 아는 중국어라고는 하오(좋다), 화이(나쁘다) 밖에 없는 훈은 애나의 중국어 푸념을 듣고 단 두 마디로 그녀를 위로한다. 비록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 가운데 서려있는 진심은 애나에게 처음으로 허탈하지 않은 미소를 환기했다. 이처럼 그녀가 바란 위로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녀의 사건과 사연에 대한 공감. 굳이 공감까진 아니더라도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그녀에게 해 주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오늘 처음 만난 ‘훈’ 뿐이다.

하루 종일의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져야하는 늦은 밤. 낮 동안 둘이 경험한 것은 앞으로에 대한 불안감이 가져오는 먹먹함에 대한 위로였다. 이것은 다시 좁고 축축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애나에게 조금씩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미련을 불러왔고, 외로운 여성들에게 웃음을 팔고 거액의 돈을 벌던 훈에게는 생활에 대한 청산의 욕구를 불러왔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아닌 애나는 이 미련이 헛됨을 알기에, 훈의 방에 그가 건네주었던 시계를 벗어두고 나온다. 이는 이제 더 이상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없음을 상징하며 그녀는 꿈과 같았던 훈과의 현실에서 깨어나려 한다.

마지막 버스 터미널 앞. 애나는 전날 훈에게 물었던 “당신은 여자들과 놀아주고 얼마를 받지요?”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기에 10달러를 건넨다. 이는 전날 그녀가 훈에게 느꼈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거래에 의함이었다는 스스로의 변명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훈은 그 10달러만큼의 감정 거래가 끝이 났음에도, 그가 애나에게 느낀 감정은 거래가 아닌 진실이었다는 듯이 그녀가 타고 가는 버스에 동승한다. 자유로운 몸으로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여인과 웃음을 팔았던 과거의 과오로 죽음의 그림자가 턱 끝까지 쫓아온 남자. 그들은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서로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 속에서 서로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남자’, ‘헤어 살롱을 하고 있는 여자’라는 각각의 소망으로 살고 있다. 이처럼 암울하고 먹먹한 현실 속에서 서로는 각자를 소망처럼 살게 해주는 빛과 같은 존재로 자리한다. 하지만 물론 그들의 인연은 안개에 가로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버스처럼, 거기서 끝이 난다. 애나와 훈, 서로가 전해주는 아름다운 빛은 안개 낀 언덕에서 오로지 서로만을 향하는 강렬한 키스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훈은 “당신이 나오는 날에 여기서 다시 만나요.” 하는 말로써 애나의 미래의 빛으로 작동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외출하는 애나.

2년 후. 3일 간의 짧지만 강렬한 기억을 간직한 애나가 출소하고, 2년 전 강렬했던 그 장소를 다시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는 한적한 카페에 앉아, 사랑을 소통했던 그 언덕을 바라보며 손에 들린 뜨거운 커피를 입김으로 식힌다. 더불어 오지 않는 훈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마치 2년 전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 대목에서 바깥의 햇살처럼 가볍게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애나의 모습은 과거의 불안함과는 사뭇 다른 설렘이 묻어 있다. 여기서 서서히 암전되는 스크린은 실제로는 밝지 않은 애나의 미래를 소묘하지만, 그녀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종류의 먹먹함을 느끼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그녀의 기억 속엔 그녀를 위로해 줄 ‘훈’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오지 않는 훈에 대한 기다림도 설렘이 된다.

먹먹함. 누구나 느끼는 이 불안감의 발로는 완전히 해소할 순 없다. 다만 <만추> 속의 애나처럼, 자신을 위로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먹먹함은 아마 설렘으로 치환되어 조금은 이 가을을 즐기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늦은 오후 서늘한 바람이 부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만남을 기다리며 따뜻한 커피에 손을 녹이고 있노라면, 현실의 암울함은 조금 잊혀지고 내일에 대한 설렘이 날 두근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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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혁 기자
ziziyazizi@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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