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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사도> 포스터 | ||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도>(2015, 이준익)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년 전, 밥상머리 앞에서 어머니는 내게 언제나 말씀하셨다. “어른이 먼저 드시고 먹어야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숟가락 드는 순서의 의미를 모르겠다. 하지만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명확히 알게 된 건, 내가 경험한 사회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 ‘어른’ 위주였다는 것. 그리고 이 ‘어른’ 위주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행동방식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목표, 배경까지 그들만의 틀로써 지배한다는 것이다.
지금 현 시점에서 젊은이들이 막연히 바라보는 성공과 이상은 수 없이 많은 형태들로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돈이라는 물질적 풍요로 점철된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을 향한 정도(正道)로 규정되어진 일반적인 루트를 따라 걸어간다. 좋은 대학, 좋은 스펙, 좋은 직장, 좋은 집, 이와 더불어 내가 좋아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무시. 물론 이런 방향과 길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이토록 획일화 된 몰개성적 목표가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한다는 의미다.
아마 대부분 이런 목표를 갖고, 획일적 길을 걷게 되는 이유는 한정적일 것이다. ‘불황의 시대’에 아등바등 살아온 부모님의 모습에 의해,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야지”하는 어머니의 한탄에 의해. 1990년대 후반 IMF이후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 경제 불황, 그 시대 사람들의 입에는 “불경기”란 말이 떠나지 않았었고, 동시에 ‘함께 잘 살자’는 과거의 마인드보단 ‘먼저 나부터 잘 살자’는 생각이 만연해졌기에 물질적 풍요는 자연히 시대의 갈망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절을 살아온 우리 부모님의 가치관은 고스란히 고착화되어 지금 시대 우리에게 전이되었다. 그러한 시대의 갈망과 더불어 높아진 80%에 육박하는 대학진학률과 동시에 더더욱 높아진 대학 등록금이 방증하듯,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지워진 기대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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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
영화 <사도>에서도 시대적 배경은 다를지라도, 영화 속 ‘영조’의 모습은 정확하게 지금의 모습을 대변한다.
영화의 오프닝. 관을 박차고 일어선 ‘사도 세자’는 칼을 들고 ‘왕’이 있는 궁으로 향한다. 무언가 분노에 이글거리는 세자의 눈은 그의 칼끝이 향하는 영조에 대한 깊은 갈등과 애증을 소묘한다. 그리고 이 폐륜과도 같은 반란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감금됨으로 끝이 난다. 관과 뒤주라는 좁고 음습한 공간의 반복은 그가 받았을 세자로서의 답답한 억압과 강요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거로의 입장은 역시나 이 상징을 강화하는 듯 갓난쟁이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경험한 세자라는 프레임의 강요를 면밀히 보여준다.
강요라는 것의 본질은 대상에 대해 한정적 활동 ‘틀’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 규정은 권위자로부터 부여되는 속박이다. 이 권위자는 일반적으로 ‘아버지’인데, 이러한 근대적인 삼각형 권력구조에 매몰되어 있는 가족 집단은 가족의 역사, 목표를 나의 역사, 목표로 고정시키곤 한다. 그러면서 불합리하게도 권력의 중심인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씌워진 틀을 온전한 내 요구와 목표라고 여기는 것이다. 동등하게 <사도> 속, 사도세자도 역시 처음엔 자신에게 부여된 세자라는 틀을 인정하고 순응한다. 하지만 사도 세자가 조금씩 경험하는 건 그의 이상이었던 합리적 정치와 그에 반대되는 아버지가 추구하는 현실 정치의 극명한 차이에서 오는 실망뿐이었다. 결국 조금씩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바라던, 사회가 바라던 ‘세자 상(相)’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현실에 실망한 채 조금씩 변해가는 그를 보고, 세상은 ‘미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를 미치게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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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
아버지-아들, 이 관계는 앞선 이를 뒤에 선 자가 쫓아가는 형태를 띤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언젠가 뒤에 선 아들이 앞에 선 아버지를 밀어내고 앞에 선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도>에서 대리청정(왕 대신 세자가 업무를 보는 것)의 형태로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세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속박과 억압을 깨치고 점점 왕의 면모를 갖춘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정치에 대해서 ‘어른이 먼저 드시고 먹어야지~’ 하는 식의 알 수없는 예의를 당위 삼으면서, 사도세자는 자신의 신념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아버지-아들 관계가 자연히 겪어야할 역전 상황을 억제하며 기형적 관계로 변화한다.
스크린 속에서 영조는 사도의 뒤에 앉아서 그의 정치를 바라본다. 그러나 사도의 선택은 언제나 과거 영조의 정도(政道)와는 반대되는 길이었으므로, “너는 나를 부정하는 것이냐?”하며 불쾌가 드러난다. 이와 같은 뒤로 물러난 자의 지나친 간섭과 타박은 아들에 대한 바른 길에의 제시가 아닌, 지금 선 자리에 대한 불확신만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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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
현실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내가 네 나이 때는…….” “요즘 젊은 것들은…….” 따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는 장담컨대 지금 시대적 맥락을 전혀 고려치 않은 기성세대의 허언과 같다. 수십 년이 흘러 변한 환경에서, 이미 한참 전의 과거인 자신들의 행태를 강요하는 타성적 도태. 그리고 이는 <사도>에서 영조가 사도 세자에게 전하는 말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다.
실제로 영조는 어머니의 천한 출신에 의해서 왕자였음에도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공부에 뜻을 놓지 않고,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해서 왕의 위치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명백히 닮을 만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사도세자는 환경이 다르다. 이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자신과 같은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현 시대의 누구들처럼 시대착오적일 수밖엔 없다.
결국 이러한 억압 속에 적응하지 못한 사도세자는 폭주한다. 그 폭주의 칼끝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틀에 적응치 못한 건 오로지 사도세자, 자신 밖에 없었기에. 그 싸움은 외롭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 뒤의 결말은 역사책에 쓰여 있는 대로 흘러간다.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차분히 말을 건넨다. “나는 아들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고, 너는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문장에 숨은 인과관계와 책임은 전적으로 ‘미쳐버린’ 아들에게 있다. 이 변명에 따르면 자신은 단지 광인에 불과한 아들을 막았을 뿐이다. 그리고 뒤이어 영조는 죽어버린 아들의 뺨을 쓰다듬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적 회개를 시도한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건, 온전히 꼰대에 대한 변명뿐이다. 꼰대의 강요에 의해 미쳐버린 ‘광인’에 대한 위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시행되는 건, 애닯게 생각한다는 뜻의 ‘사도’라는 시호를 통한 ‘유감’ 표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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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
요새에 임금 피크제니, 계약직 4년이니, 열정 페이니 하는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이 안타까운 현실의 환경은 모조리 젊은이들의 ‘잘 살아보겠다’는 강요된 프레임 안에서 실행되는 부조리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윗 세대의 희망이 고스란히 아랫 세대인 우리에게 전가된 이 목표 안에서 실행되는 것은 힘듦에 대한 위로와 미래의 방향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는 쌀이 귀해서…….” 따위의 이야기뿐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우리도 <사도> 속 사도세자처럼 폭주의 가능성을 지고있다. 명백히 이 사회의 어른(꼰대)들은 젊은이들의 ‘광인 화’를 방조한다. 미래를 짊어질 현재가 없으면 쇠락은 기정된다. 이런 사회의 환경이 애닯기에, 나도 함께 ‘유감’을 표한다.
이처럼 영화는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다. 하지만 여기서도 젊은이들의 위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약간의 위안은, 사도의 어린 아들(정조)이 장성하여 그의 무덤 앞에 엎드려 술 한 잔 건넨다는 것. 그러므로 이 잘 만든 영화에 심적인 아쉬움이 남을 수밖엔 없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서는 당신의 발걸음이 무거운 까닭도 역시 이 이유가 건네는 무거운 현실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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