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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것의 씁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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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틸 라이프 [Naver 영화]

[디아티스트매거진=권용민] 막 뜬 뿌연 눈의 초점이 서서히 뚜렷해지고 이제 열린 귀는 아직은 생생히 듣지 못할 때 그리고 그러한 눈과 귀의 열림과 닫힘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그 속에서 비춰지는 인물들은 무척 먹먹하기만 하다. 그곳의 이들은 술 한 잔으로 숨을 들이 마시며 담배연기로 따갑게 뱉어내고 육체는 쬐는 볕에 까맣게 짙어져만 간다. 그들은 연신 웃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웃게 만드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중 산밍만이 유일하게 마시지 않고 뱉지 않는다. 볕을 원망이라도 하듯 찡그린 눈으로 옷가지를 벗어 넘길 때 그리고 드러나는 그을린 육체는 배 위의 어느 누구와도 닮아 있을 때,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나열된 육체노동자들 사이에서 어색함이, 그러니까 단 한명의 웃지 않는 육체노동자만이 유독 거슬리는 것은 아마 의아할 것이 못될 것이다. 정작 궁금한 것은 ‘왜 그는 웃지 않을까.’이다. 어쩌면 둔탁한 그들의 육중한 몸집에서 새어나오는 수줍은 웃음이 더욱 의아한 일일까. 분명한 점은 그 둘 사이 어떠한 간극이 비추어 진다는 것이다.

산밍은 16년 전 곁을 떠나간 아내와 딸을 찾으러 그렇게 싼샤에 들어선다. 어느 때고 피로한 그를 육중한 사내가 집어 들어 허름한 창고로 밀어낸다. 그 앞에 펼쳐지는 것은 미덥지 않은 손재주였다. 백지를 달러로, 유로화로, 인민폐로 바꾸어내는 마술을 일방적으로 관람하게 하고는 그들에게 수업료를 요구한다. 한 마디로 같잖게 포장한 갈취이다. 그는 그러한 부당함에 관하여 저항하지 못한다. 그가 칼을 집어든 것 역시 능동적인 저항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동적인 수색과정에서 발견된 칼이라는 점에서 사내 스스로가 섬짓 놀라버린 상황에 가깝다. 그의 위 같은 무기력함, 어떠한 ‘기세에 짓눌려 나약하다.’라기 보다 ‘살아야 한다는 삶의 악착같은 의지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한없이 초라한 무의지는 그를 하나의 정지된 사물로 빚어낸다. 타인의 손에 이끌리거나 혹은 탈 것에 실려 움직인다는 것으로 동적인 측면의 정지로서 사물적 이기도하며 살아있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적 측면의 무의지로서 또한 사물적 이기도하다. 말하자면 그는 인격화된 정물이다.

이러한 움직이지 않는 정지의 상태, 부동에 관하여 극은 불특정한 위태로움을 부과한다. 강박적일 만큼의 피사체들의 정물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안한 것이 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수평으로서 제한된다. 이따금씩 수직으로 방향을 돌리다가도 그 폭이 무척이나 좁아 움직였다 말하기에는 너무도 과장스러울 때, 그 미세함은 그저 떨림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카메라의 수평이동에서 산밍은 그 시선을 이끌지 못한다. 그러니까 한 인물이 극의 시선을 이끈다고 할 때 카메라는 그 인물의 방향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이동하다가도 인물이 다시금 왼쪽으로 발길을 옮겼을 때, 극의 시선도 더불어 왼쪽으로 이동하여야만 한다. 극의 시선이 인물과 동행하려는 충동적인 몸짓을 움찔 일 때, 인물은 시선의 주체가 된다. 허나 산밍은 시선의 움직임을 부추기지 못한다. 그는 정지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수평이동에서 시선은 인물을 지나쳐 탈락시키거나 더딘 움직임으로 인물을 앞서 보내기도하며, 인물이 부재한 공간을 응시하는 시선에선 고착된 대상이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산밍이 움직인다는 것은 일종의 탈각되지 않으려 발버둥 대는 부박한 몸짓에 근접하다. 그는 이끌지 못하고 이끌려가며, 걸어가지 못하고 떠밀려 간다.

   
▲ © [Naver 영화]

‘망고’라는 꾸깃한 담뱃갑을 펼쳐 적은 아내의 주소, 시추안성 펑지에현 화강 5번지. 허나 도착한 그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물 표면의 풀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닿을 수는 없는 그 장소가 잠긴지는 몇 년 전도 아닌 자그마치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늦어도 꽤 한참이나 늦은 셈이다. 물이 육지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은 정부의 댐 건설로 인한 것이었다. 애초에 벽면은 허물어져 앙상하거나 무엇을 칠하기엔 사정이 여의치 못한 것도 한몫 했겠으나 외벽의 무늬라고는 표기된 물의 높이가 전부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물은 바닥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있고 창백한 건물들은 옥상을 기점으로 위태롭게 허물어져 간다. 발을 붙일 곳이라고는 얼마 남지 않은 땅위의 건물조차 차오를 물의 높이를 덧칠하는 것을 보니 그마저도 없어질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여야 한다. 건물에 짓이겨 압착되지 않으려 그리고 수몰되지 않으려 어디론가 옮겨 가야하는 것이다. 사물은 물론이거니와 인물들마저 정물화 되어버린 공간에서 ‘부동’이란 말은 곧 ‘죽음’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것은 또한 앞서 말한 정물이 갖는 불특정한 불안의 연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물에선 시간을 양분삼아 생장하는 끔찍한 형상의 괴물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괴물은 정물이 동물이 되도록 부추긴다. 정지의 상태는 이곳에선 죄악시 여겨진다. 하여 이 모든 공간이 수몰되어 반듯한 물만이 오롯해질 때를 기다리는 듯 지독히도 피어나는 안개에는 메마른 한기가 서려있는 듯하다.

   
▲ © [Naver 영화]

무지막지한 육체노동으로만 쌓아올린 삶에는 돌이켜볼 과거도 넘겨짚을 미래도 없다. 정말로 그들의 기억엔 현재의 갈급함만이 빼곡할 것이다. 지 아 장커는 이들에게 ‘힘없는 위안’을 건네려 극 중 몇 번이고 시도하지만 그것의 귀착점은 결국 실패라는 점에서 애달프다. 정물화 된 이들을 위로하는 방식은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으면..’ 하는 소극적인 바램이 감각화 될 뿐이다. 이를 테면 얼핏 보아도 균형이 맞지 않는 건물. 축조가 덜 되거나 철거가 덜 된 듯 한 건물 밑바닥에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일 때 그리고 그 형물이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치솟을 때 거기엔 수몰과 헐어짐으로부터의 이탈이 그려진다. 그리고 션홍에게 한 통의 물이 쥐어진 것, 인민의 기호품인 차와 술을 제쳐두고 그녀만이 유일하게 물로서 목을 축인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어떠한 부수적인 것도 가미 되지 않은, 말 그대로의 생물에선 차오르는 수면과의 어떠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 비워 내어도 다시금 채워 넣고 그렇게 그녀는 여럿 날 동안 물을 마신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시점은 특정 상황이 완결된 이후이거나 사전에 행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물을 마신다는 것에 카메라가 상당부분을 할애한다는 것이 된다. 실상 물을 마신다는 것, 이 행위 자체는 별 놀라울 일이 못된다. 허나 그것이 부분적으로 기능할 때, 그리고 어떠한 것과 특정한 성질을 공유하고 있을 때 그 행위는 단순히 생리적이지 않다. 션홍은 2년 만에 남편을 만나지만 그 관계는 2분도 채 되지 않아 끝을 맺는다. 2년은 2분이라는 시간 앞에 한없이 무력하기만 하다. 그리고 공허한 그녀가 돌아가는 객선에서 다시 한 번 얼마 남지 않은 물통을 카메라가 잡는다. 이때 의 물통은 여타 시퀀스의 물통과는 그 장악력이 비할게 못된다. 삼협댐이 인민들의 값진 희생의 결과물이라 공공연히 말하며 그 수위를 기념할 때, 등장하는 이 물통은 정말이지 그녀의 서사를 최종적으로 완결 지으려는 도구로서 충분하다. 그녀가 그토록 목을 축였던 것은 그 수면에 대한 애꿎은 분풀이라 해야 할까. 그들을 갈라놓은 시간의 흐름이 물로 치환되었을 때, 그 물위에서 또 다른 물을 들이키는 여인의 매끈히 움직이는 연약한 목덜미는 물에 관한 어떠한 원망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한 야윈 인민들의 손으로 힘겹게 물 밑 괴물의 아가리를 부여잡으려는 듯 한 처절함이 보이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수면이 차오르지 않도록 억제시키려는 바램의 시각화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애씀이 고조되는 것은 축 늘어진 채 나열된 각기 다른 시간의 시계들이 정지된 순간이다. 시간을 멈춘다는 것만큼 극단적이고 즉각적인 것은 없다. 그곳에선 정적의 침묵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침이 축적하여 분침으로 그리고 그 분침이 쌓여 시침으로 이동하는 시간의 동적임. 시간을 체험하는 것은 이 움직임에 있다. 우리는 움직이고 그 시간을 살아낸다. 그래서 그 시간을 멈추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전면적인 삶의 포기상태에 이르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시간을 석화하려는 이 시퀀스는 절절하다. 애석한 것은 이 위안들은 결국 예정된 실패로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위안은 힘이 없다. 건물은 솟지 않고 바닥으로 꺼질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물을 들이킨다 한 들, 수면은 약속된 높이에 키를 재려 자신을 더욱 세울 것이고 시계는 멈춰도 시간은 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굼뜬 모습을 나는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들의 삶처럼 먹는 음식엔 다채로운 맛은 없고 심심하지 않을 정도의 간만 배어 있다. 지금처럼 맛에 관하여 열띤 적도 없었으나 저렇게도 맛에 무딘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과 함께 술을 곁들이고 차를 곁들이고, 혹은 사탕을 입에 우물대거나 담배를 꼬나물었나 보다. 지 아 장커는 인민들에게 담배, 술, 차, 사탕 이 네 가지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극은 담배와 술, 차와 사탕으로 그들의 경직된 육체를 풀어준다. 육중하고 둔탁한 그들의 몸을 간질이는 것이 정녕 이 초라한 정물들이란 사실, 그러고 보니 앞서 언급했듯 산밍 역시 마시지 않고 뱉지 않을 때 웃지 않았다. 지 아 장커는 특정 정물이 단순히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불특정한 역할을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물의 의미 자체는 고정적이지만, 부수적 행위들로 하여금 더욱 다각화되고 세밀해지며 하나의 추상적인 시적 기표를 생산해낸다. 산밍이 정물에서 인물로 회귀하는 지점 역시 네 가지의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시점이다. 다른 이와 팔을 겯지 않던 그가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것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담배와 술, 사탕과 차는 유일의 동력원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이 자의적인 인물로의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는 점에서 카메라의 시선에 관한 주체성의 복권이기도 하다. 션홍이 남편에게 보낸 차가 폐공장의 창고에서, 그것도 낡고 해진 정물들 사이에서 유독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을 때 그 차는 2년의 공백 동안 흐느꼈을 그녀의 참담함을 축약하여 지니고 있다. 산밍이 아내의 삼촌에게 고향 특산품으로 가져온 술 두 병을 꺼내들 때도 그랬었고 왠지 모르게 허술한 불량배인 마커와 담배를 나눌 때도 그랬었다. 극을 진행시키는 것은 인물들의 행위가 아니라 마치 정물들의 일관된 침묵이거나 무관심에 있을 것이다.

그 정물의 감흥이 또 다른 정물화 된 인물에게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별 볼일 없던 손재주와 달리, 진심으로 기적 같은 마술이 펼쳐지는 순간은 아내를 되찾으려 약속된 금액을 벌기 위해 산시의 광산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일어난다. 술잔을 부딪치고 얇은 개비의 담배를 돌려 나누면서 그들을 움직이도록 부추기기 시작한다. 그 때의 카메라의 시선은 그들을 결코 외면하여 소실시키지 않고 인물이 부재한 공간을 응시하지도 않는다. 전적으로 그 시선은 모든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어 한다.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여분도 없도록 인원에 맞게 꽂힌 담배를 비워내고 그들은 그것을 입에 물어 피고 있으며 그럴 때 다시 번지는 소녀 같은 수줍은 웃음이, 뭐랄까 답장을 전제하지 않은 신을 향한 기도의 막연함처럼, ‘이렇게 사는 거지.’에서 묻어나는 씁쓸함 같은 것. 마음이 아픈 것. 뭐 그러한 맘 저릴 것들이 그 공간 안에서 협업하여 단번에 느껴지도록 한다. 천천히 골고루 좌우 반복해서 응시되는 시선에선 그렇게 결국 떠나야함을 결심한 남루한 육체들을 가엾게 쓰다듬고 품에 조심스레 안으려 하는 것만 같다.

   
▲ © [Naver 영화]

그리고 정든 동료들과 널브러진 잔해 위를 터벅거리며 걷는다. 간신히 버티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건물 사이에서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 가는 줄을 타는, 덕분에 허공 위를 걷는 도인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을 산밍이 초조히 바라보고 다시 동료를 보고 또 한 번 그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발길을 되돌릴 때 그것은 자신들의 처지에 관한 일종의 은유가 된다. 이들이 당도한 산시의 광산은 과연 경유지가 아닌 종착지일까. 아니, 애초에 종착지는 있기는 한가. 흔들대는 줄타기를 시중에 닫는 무례함과 매몰참은 어떠한 연유일까. 혹여 그 사람이 낙하하는 조바심에 휩싸여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일까, 보다 끔찍하게 건너온 그 줄을 다시 되돌아가지는 않을까.

고된 육체노동으로만 집약된 그들의 뻑뻑한 몸집을 축이는 것이 정녕 술이자 담배이자 차이자 사탕인지, 아직 주저하게 된다. 너무나도 혹독한 이들에게 ‘그래도 살아야지.’라는 말은 또 얼마나 가혹한 것이 될까. 그저 살아낸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위대한 이들에게 삶은 시간과의 투쟁이 되어버리고 어느 날 중 하루가 아닌 연장된 하루를, 마치 덤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속을 섣불리 말하기가 나는 선뜻 머뭇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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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민
ske9396@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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