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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을 향해 무릎 꿇고 통곡하다 <리바이어던>

신동혁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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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리바이어던>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바이어던>(2014,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25살인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TV를 통해 발견하는 뉴스 거리는 언제나 의견 조율, 대립과 관계된 ‘정치’(입법, 행정, 사법부의 활동과는 다른 일상적 정치 포함)라는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정치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를 잠시 살펴보니 가벼운 부분은 차치하고 눈에 띄는 부분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 호흡으로 읽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이 긴 문장에서 가장 핵심으로 자리하는 단어는 바로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획득은 ‘사회 질서’의 정립과 안정이란 결과로 점철된다는 의미였다. 이 논리에 충실히 따른다면 지금껏 내가 발견해 온 ‘뉴스 꺼리’에 대한 해결은 간단했다. 누군가 완고(完固)히 권력을 획득하면 되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시장 ‘바딤’

영화 <리바이어던>에서도 또한 이런 ‘정치’적인 문제가 영화 서사의 시발점으로 존재한다. 시민 ‘콜랴’와 그의 집을 허물고 별장을 짓고 싶어 하는 시장(市長) ‘바딤’의 갈등. 언뜻 불합리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이 상황을 ‘바딤’이란 한 개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우김이 아니라 시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치’로 바라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위의 문단에서 밝혀진 논리로 시민들의 투표라는 정당성을 갖고서 완고한 권력을 소유한 바딤이 휘두르는 콜랴를 향한 권력의 주먹은 과연 사회 질서의 안정을 가져오는 행위인 것인가?

17세기의 정치 사상가 ‘토마스 홉스’는 영화의 제목과 같은 ‘리바이어던’을 ‘국가’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란 기독교의 구약 성서에서 단단한 비늘과 튼튼한 아래턱을 지닌 무적의 괴물로 묘사되는데, 왜 홉스는 국가를 이 괴물로 비유한 것일까? 아마 그것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무언가 강렬한 힘의 소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또한 무섭고도 두려운 이 괴물 형상의 국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개인의 이기심과 폭력성이 불러오는 카오스 상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 존재로 자리한다. 적어도 홉스의 주장은 그렇다.

<리바이어던>에서 이 강력한 괴물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명백히 권력의 소유자 ‘바딤’이다. 그럼에 따라 그의 존재 목적은 ‘정치’의 사전적 정의와 ‘리바이어던’의 존재 이유처럼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케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바딤’은 고작 ‘땅’과 ‘별장’이란 지극히 사사로운 소유물의 주권에 대해 그가 보호해 주어야 할 ‘콜랴’와 알력 다툼을 벌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하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한다. 이는 비단 영화 속에서 꾸며진 ‘픽션’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도 만연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바이어던>은 미국 콜로라도에서 있었던, ‘킬도저(killdozer)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지극히도 정치적인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의 중심은 ‘권력’이란 단어에 숨어있다.

‘권력’ 그것의 본원은 ‘사회 안정’으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권력을 소유한 이는 하늘이 정해준 사람이 아니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룩을 조건으로 피지배 계층의 권리를 이양 받은 것에 불과하단 의미다. 피지배자가 없으면 지배자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바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1년 앞으로 다가온 선거를 두려워하지만, 두려움의 해소를 위해 선정(善政)보다는 ‘신’에게 의지한다. 마치 ‘권력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러므로 그는 유권자인 콜랴에 대한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변호사 드미트리의 결심

그러므로 선정을 대가로 바딤에게 권리를 넘긴 ‘유권자’ 콜랴는 이런 불합리함에 의아할 뿐이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가?’ 따라서 그는 바딤의 폭력에 맞설 무기로 ‘법’을 찾는다. 홉스에 따르면 콜랴가 이 불합리함에 의지하는 ‘법’과 ‘공평’은 국가의 이성과 의지라고 하였다. 이는 바딤 개인의 욕망으로 휘두르는 폭력에 제동을 걸어줄 수 있는 이성과 합리로 다가온다. 그렇게 바딤에게 그 동안의 악행을 당당히 따지는 변호사 ‘드미트리’의 모습은 마치 따끔한 충고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충고는 무시되고, 법은 무력했으며 콜랴는 더욱 큰 위기에 직면한다.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콜랴는 술에 취해 길을 걷다가 신부님을 보고 따지듯 묻는다. “만인에게 공평한 신은 존재합니까?” 이는 마치 민주주의 하에서 신처럼 스스로의 위치를 성스러운 영역으로 격상시킨 ‘법’의 ‘공정성’에 대한 갈구와 같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당황한 신부님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대답을 대신한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리바이어던)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 간청하겠느냐……,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욥 41:1~11)

이는 성서에서 ‘욥’의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하는 물음에 대한 ‘신’의 대답이다. 명백히 욥은 죄가 없었다. 아니 신에게 인정받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들이 닥친 고난은 확실히 불합리했다. 그리고 신은 이 대목에서 욥에 대한 위로와 사과보단 리바이어던을 창조한 자신의 전능함과 욥에 대한 주권을 과시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또한 이 대답은 <리바이어던>의 콜랴에게도 같은 의미로 돌아온다. 법이라는 민주주의 사회의 ‘신’은 헌법 기준에 따라 명시적으로 권력에 대한 시민의 예속을 공고히하며, 주권의 소유가 권력자에게 있음을 명확히 밝힌다. 명백히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법’의 모습에 철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은 자발적으로 권력에 예속화되고,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피지배자 일반에 대한 규범이 법을 대체하여 작동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법’이라는 허울뿐인 공정함보다 현실에서 앞서는 건 규범적 폭력이다.

여기서 신과 법의 차이는 명확하다. ‘신’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줄 수 있지만, ‘법’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줄 수 없다.

이러한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현실에서도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은 모든 권력의 형태는 ‘관계’의 파생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횡포는 그들에게 있어 권력의 원천인 ‘관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결국엔 상실케 만든다. <리바이어던> 안에서 가부장적인 콜랴의 집착과 억압에 시달린 채, 사랑과 안정을 갈구하다 결국 자살하는 그의 아내 릴랴처럼 말이다.

따라서 <리바이어던>이 시사하는 메시지는 모조리 권력자들을 향한다. 욕망에 의한 힘의 남용과 그 결과 이어지는 권력 관계의 상실은 홉스의 말처럼 혼란을 부추기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의 회귀가 이뤄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메시지는 결국 권력자의 귀에 전달되지 못하고, 엔딩에 결국 콜랴의 집을 향해 파괴의 손길을 내민 포크레인의 모습은 괴물 리바이어던의 현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내 뼈대만 남는 집과 바닷가에 널브러진 부서진 배의 흔적, 어디선가 죽음을 맞이했을 고래의 뼈는 투쟁에서 패배하고, 거대한 괴물에 집어 삼켜져 소화된 미물의 미래다. 남는 건 오로지 하얗게 밀려드는 파도의 막연함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장엄함. 그리고 그 앞에 한 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신의 권위 앞에 무릎 꿇고 울며 기도하는 ‘욥’처럼 빌고 또 빌 수밖에……….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결국 <리바이어던>에서 밝혀진 권력의 본질과 법의 본질은 그 아래 숨죽이며 살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안쓰럽게 소묘했다. 콜랴와 드미트리가 행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안타까운 헛발질이 과거부터 아쉽게 사그라든 혁명의 모습과 같아서 더욱 그랬다. 우리가 막연히 희망을 품고 기대하는 ‘정당성’이라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목적인 것일까? 합리적인 상식에 미소 짓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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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혁 기자
ziziyazizi@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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