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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더 헌트> 포스터 | ||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더 헌트>(2012, 토마스 빈터베르그)
우리가 축구 경기 같은 스포츠 경기를 보면 언제나 해설자들은 시작과 동시에 같은 소리를 한다. “선제골을 넣는 쪽이 주도권을 가져갈 겁니다.” 비슷하게 학창시절에 싸움을 잘하는 친구의 무용담도 역시 언제나 “선빵이 중요해”란 말로 시작되곤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처음’의 중요성을 인지한다. 같은 맥락으로 ‘파죽지세’나 ‘시작이 반’이란 말도 역시 시작의 두려움과 시작과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만큼 중요한 시작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이들은 어떻게 될까? 더구나 그 시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설상가상으로 당황해서 쐐기 골까지 먹혀버렸다면? 내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어마무시한 사건의 한 가운데에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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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루카스와 클라라의 대면 | ||
유치원 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 ‘루카스’는 이혼을 한 외톨이 가장이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옛 친구들, 새로 사귄 여자 친구와 함께 즐거운 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곧 그가 일 하고 있는 유치원의 원생이자 친구 테오의 딸 ‘클라라’의 말에서부터 고난이 시작된다.
“루카스 선생님이 싫어요, 그의 성기는 앞으로 뻗어 있어요.”
이 무시무시한 사건의 가능성을 가진 대사로 클라라는 결백한 루카스에게 선빵을 날린다. 그리고 순진하고 순수한 어린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관념은 루카스를 아동 성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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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클라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어른의 모습 | ||
하지만 이처럼 어린아이의 단순한 한 마디에 여론이 호도되는 현상은 스크린 바깥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프레임 이론을 주창했다. 이 이론은 ‘맥락’이 우리의 행동과 이해를 특정 짓는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니까 <더 헌트>의 루카스의 상황처럼 진실은 차치하고 그 주변 상황에 의해 모든 시선이 규정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코끼리를 생각하면 안 된다”는 외침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히려 코끼리가 떠오르고 마는 이 언어적 전략을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코끼리는 곧 인지와 관념란 ‘프레임’에 코끼리를 고정시켜 버린다. 따라서 그는 이 전략에 대한 최악의 대응은 ‘코끼리’라는 상대방의 언어를 활용하면서 방어하는 것이며 그 프레임을 부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프레임이 활성화된다고 하였다.
클라라의 비의도적인 프레이밍에 아동 성 범죄자로 낙인이 찍힌 루카스는 외친다. “난 아냐! 내가 그러지 않았어!” 하지만 그가 그렇게 외치면 외칠수록 그는 아동 성 범죄자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오히려 더 그 프레임에 매몰된다. 그렇게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최초 프레이밍의 희생자가 되면서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유죄에 대한 확실한 인정과 선고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를 처음엔 응원했던 여자 친구 ‘나디아’도 조금씩 그에게 덧씌워진 프레임에 의해 진실을 의심하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 많은 유치원생들 또한 루카스의 있지도 않은 범죄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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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편견 어린 시선으로 루카스를 바라보는 사람들 | ||
이와 같은 프레임의 무서움에 관해 고발했던 영화는 그동안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2014년에 개봉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던 <나를 찾아줘>(데이빗 핀처)는 언론 미디어에 의해 씌워지는 한 개인에 대한 폭력적 프레임의 무서움을 고찰했다. 그 안에서 무고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편견의 시선은 한 인물을 파멸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진행되는 부부의 ‘진실 vs 프레임’의 싸움은 결국 사회적 시선에 이끌려 구속된 ‘쇼윈도 부부’의 형태로 마무리되는 가혹함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러한 프레이밍은 영화와 같은 픽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듯 우리 사회에서, 우리 주변에 횡횡한다. 얼마 전에 큰 논란을 가져왔던 ‘세 모자 성폭행 사건’ 논란도 양쪽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일방적인 한 쪽의 의견이 주도하는 대로 여론이 호도한, 거짓과 왜곡이 가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가혹한 편견의 시선은 대상에게 변명과 해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매도하며, 더 나아가서 여론 전체에 대한 호도를 실행하곤 한다.
<더 헌트>에서 마지막에 결국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는 루카스는 다시금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 듯하다. 예전처럼 친구들과, 여자친구와, 아들과 함께 사냥을 즐기고 술을 마시는 여유로운 생활,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을 프레임에 가두었던(비의도적이었지만) ‘클라라’를 안아주면서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린 것 같이 느낀다. 모든 것이 행복한 상태.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 그리고 그 이질적인 분위기에 들어맞게도 엔딩 씬에서 그는 자신을 겨냥한 누군가의 총에 맞을 뻔한다. 죽음의 위협에서 간발의 차이로 비껴나간 루카스는 억울함과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멀리 달아나는 그 누군가를 바라본다. 그가 느낀 이질감과 생명의 위협은 아직도 그에 대한 ‘아동 성 범죄자’란 끈질긴 프레임이 생존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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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교회 안에서 안락을 갈구하는 루카스 | ||
이 가혹함에서 다시 완전한 현실로, 행복으로,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없는 걸까? 아쉽게도 이 의문에 대한 정답은 어디서도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영화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객관적 시선’의 유지다. 사람들은 아무리 스스로 객관적인 척 해도, 사실 주관적일 수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객관적 시선’의 유지란 것의 의미는 최소한 공평한 입장에서의 판단을 요하는 전제인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이 사실은 한 쪽의 입장에 의해 너무 편견에 휩싸인 것은 아닐지. 한 쪽의 입장만 듣고 사실을 고정시켜 버린 것은 아닐지. 너무 강렬한 스테레오타입을 진리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닐지. 조금 스스로 되돌아볼 시간과 생각이 필요한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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