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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그 언저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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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Naver 영화]

[디아티스트매거진=권용민]무색의 흑백사진, 단순 명암으로 피사체의 부피감을 담아내는 흑백사진이란 것은 이유모를 기묘한 구석이 있다. 듬뿍 담긴 색이라는 허물을 발가벗기고 남은 앙상한 흑색이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쨍쨍한 색의 옷가지를 내던진 나신의 흑색은 수줍은 웅그림을 보이면서도 살 내음의 향내는 되려 선명해 지는 듯하다. 색이라는 것이 꿈틀대는 역동을 말한다면 무색의 흑백이라는 것은 변하기를 멈추고 흐르기를 멈춘, 마치 벽처럼 우두커니 서있기만 한 정적임을 말한다. 흑백은 속절없이 시간을 감내하여 지친 삶의 고단함을 떠안고 풀이 죽은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 사진을 마이어는 연신 찍어댔다. 셔터를 눌러대는 가는 손가락엔 그 자국이 지문인 냥 새겨있을 것이고, 렌즈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것의 여과 없이는 어색해 했을 것이다. 자그마치 15만 통의 필름이다. 이정도면 삶을 살았다기보다 사진을 살았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연속된 흐름의 삶이 아니라 짤막한 삶의 부분을 한데 모아 이어붙인 필름처럼 말이다.

   
▲ © [Naver 영화]

 

1.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그래, 이 영화는 마이어가 흘린 흔적을 이정표 삼아 삶을 추적한다. 누군가 애써 숨기고자 했던 무엇을 집요히 추궁하는 느낌이랄까.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죄책감을 삯으로 지불하고 그녀의 사진에 젖어들도록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비집어 든다. 그녀를 아는 것이라 말하기엔 께름한, 알아내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관객은 보통 무대의 뒤편을 볼 수 없다. 무대 연극의 배우는 그 어떠한 슬픔이 그를 감싸 짓누른다 하여도 무대 앞에선 눈물을 훔쳐야만 하고, 색을 겹겹이 덧칠 한 화가의 캔버스를 통해 그를 가늠할지언정 그의 작업공간은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예술가의 사적 공간이란 지극히 은밀하고도 깊숙이 유폐되어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한 사적 영역의 존중이라는 불문율은 어느새 돌변했다. 이제, 예술가는 더 이상 작품으로 발화하지 못한다. 사적 영역의 은폐는 곧 골방에 갇혀 고독하게 창작에만 몰두하는 케케묵은 옛 사람임을 표명하는 것일 뿐, 소통이라는 명맥 하에 억지스레 그들의 삶을 열어젖히고야 만다. 이러한 상황이 비단 오늘 날로서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한 예술가의 삶이란 언제나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였으므로 ‘요절한 비운의, 범상치 않은’의 극적인 수식구가 그 예술가를 한껏 포장하곤 했다. 허나 그것이 결코 그의 작품과 연관되어 지배적인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다. 보통 풍문에 그칠 거리거나 작품을 온전히 이해키 위한 최소의 앎에 해당된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위치에 붙박인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단순히 풍문에 지나지 말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진위를, 검증을 토대로 예술가들의 민낯 겹겹을 떼어낸다. 이것은 ‘한 예술가의 작품성은 오로지 그의 창작물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인가 혹은 삶의 전반적인 맥락과 견주어 이해되어야 함이 옳은 것인가’ 와는 개별적인 것으로서 삶과 작품의 기형적 얽힘에 관한 논의이다. 예술가의 사연이 작품과 얽혀 들어가는 지점에서 우린 과연 작품을 소비하는 것일까, 예술가를 소비하는 것일까.

   
▲ © [Naver 영화]

2. 예술가와 작품 그 사이에서.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은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사진인가, 혹은 그녀의 불가사의함 인가. 생전에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감싸 매던, ‘예술가’라는 이름이 못내 거북하여 묵묵히 셔터를 누르던, 온전한 제 모습이라곤 하나 없이 자신을 찍을 때면 어느 것에 반사된 이미지로서 자신의 눈조차 응시하지 않던 수줍은 그녀를 불러 세우는 모짐이 이 영화에선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될까. 그렇다면 돌아와서 이 영화에서는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작품에 관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나. 뒷무대가 아닌 그녀의 주 무대인 앞무대를 또렷이 응시하는 자는 딱 한사람 ‘조엘 메이어로윗츠’를 제외하고 그 모든 인물들은 전적으로 뒷무대를 기웃거린다. 이러한 기웃거림, 삶과 작품의 기형적 얽힘 속에 예술가는 하나의 극적 캐릭터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비비안 마이어’의 순수 작품에는 한 가닥의 관심도 없었다. ‘제 호기심을 이끌었어요.’라고 극의 포문을 여는 영화에서 그녀의 작품을 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극의 포커스는 순수 그녀의 괴이함으로부터 흘러온다. ‘도대체 누구’, ‘사후에 벌어진’으로 점철되는 그녀의 불가사의함과 더불어 전화번호, 모자, 신발, 버스표 심지어 이가 담긴 필름 통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누구인가’라는 문미에는 ‘불가사의함’으로의 보충이 불가결하다. 그로인해 그녀의 필름은 더 이상 작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녀의 불가사의함을 가중시켜줄 치렛감으로 치환될 뿐, ‘비비안 마이어’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인물의 극적 드라마를 써내려 갈 조잡스런 소도구로 탈바꿈한다.

작품에서 엿보이는 그녀의 진실 된 눈, 부지런한 손, 낯선 타인의 거리를 배회하는 꾸준한 다리의 걸음이나 빳빳이 굽은 목과 같은 창작 과정의 수고로움은 놀라울 만큼 단번에 생략되고 기이함의 순간에 매료되느라 여념이 없다. 한 인물의 극적 드라마에 집중될 때, 그러한 수고는 매력의 과시적 대상으로서 옴짝달싹 못한 채 고정된다. 앞무대를 제쳐두고서 뒷무대를 기울일 때의 효용성 내지 잔여물은 어떨까. ‘비비안 마이어’의 뜨문뜨문한 거주지와 폐쇄적인 기질이나 모험적 행위들을 살피는 것이 정작 작품과 연계되지 못하고 소외 되어질 때, 그 작품은 창작자와 수용자 그 어느 편에도 흡수되지 못한 채 허공을 부유한다. 창작자와 수용자라는 양자 간 작품의 매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예술가란 자신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한 인물의 극적 서사로서 판타지에 비근하게 머물며, 한 기인으로서 기억되는 것 말고, ‘예술가는 오로지 작품으로서 말한다는 것은 낡은 이야기’로 치부되어질 때, 그 말의 이면 속에는 작품의 도외시를 포함하고 있는 걸까.

‘예술가는 오로지 작품으로서 말한다는 것’이 낡은 이야기 일지라도, 작품은 결코 도외시될 수 없는 것으로 잔재해야 한다. 작품과 더불어 그 어떠한 것이 줄줄이 엮일지라도 ‘작품’은 최후까지 착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작품으로서 발화하지 못하고, 역으로서 작품으로 예술가의 캐릭터적인 원형적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사용되어질 때, 수용자는 자신의 삶에 환원 시킬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다. 예전 필자의 친구가 말 한 적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 독창적인 것과 이상한 것 사이의 분별을 혼동하고 쉽게 매료된다.’ 동의한다. 극 속에서 ‘비비안 마이어’를 헤매는 것은 바로 위의 맥과 닿아있다. 작품은 전적인 치장의 의미로서 국한 시키고, 지나치게 사적 드라마를 엮어가는 것은 단순한 기괴함이다. 성찰할 가지도, 반영시킬 상이 맺히지 못하는 얼룩짐에 고개를 들이밀고 마주하는 것은 엄밀히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지 않나.

   
▲ © [Naver 영화]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란 현전해야 하는 것이다. 치장을 넘어 삶을 이해하기 위한 환원적 도구로서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비비안 마이어’는 살아생전에 조차 말을 삼갔으니 사후가 된 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녀는 비록 감각화 된 언어로서 말을 삼갔지만, 그녀의 흑백 필름이 대신 말을 하고 있다. 탐닉할 맛과 음미할 향, 간지럽힐 음들과 축축한 낭만의 흐느낌 혹은 비릿한 맛과 비산한 향, 거칠고 힘겹게 넘어오는 음들이나 탁한 슬픔의 끈적임, 모든 감각들을 그녀가 지닌 필름들이 정갈하게 지각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연장에서 일절 말이 없었으나, 그녀는 작품으로서 영원토록 말을 걸고 있지 않나.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하다. 앞에서 주절댄 소리를 잠시나마 접어두고 영화 속 간헐적으로 비추는 사진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일생을 침묵으로 관조한 이에게 죽음으로 아로새긴 반듯한 적막을 흔들어 깨울 수 있을까. 더구나 그녀는 흑백 필름으로 발화하는데, 외면하여 소실시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격한 감화로 몸서리칠 필요까진 없다. 시간이 미처 앉지 못한 순간을 담아내는 저 필름 사진을 보고 약간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보다 깊이 사유해보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저 사진을 보고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다독여보자.

   
▲ © [Nav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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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민
ske9396@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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