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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다> | ||
[디아티스트매거진=박슬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문장을 시작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유명한 그 첫 문장에 딴지를 걸 생각은 아니지만, 모든 시대가 그러하지 않은가? 시대가 혼돈한 이유는 인간이 혼란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순과 비논리가 뒤엉킨 이 세상에서 인간은 촛불 같은 자유의지를 지녔다. 하와는 사과를 먹을 수도 안먹을 수도 있었고, 카인은 아벨을 죽일 수도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더 큰 혼돈을 초래한다. 무엇을 선택해도 언제나 선택이 또 남아있다.
이다는 서원식 직전의 수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고아로 자랐으나 누구도 그녀를 버린 적 없고, 부모를 만난 동시에 그들을 땅에 묻는다. 이 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살아온 그녀는 이모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의 대립을 마주한다. 그녀는 여느 인간과 같이 수많은 아이러니의 공존이며, 여태껏 살아오던 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기존의 세계에는 청빈, 겸손, 금욕의 세계다. 다른 세계에는 재즈와 남자, 그리고 여자가 있다. 두 세계는 명확하게 분리된 듯 선택을 강요하고, 이다는 경험을 택한다.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배우의 움직임도 정적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보다는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다. 그러한 연출은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보다는, 몇발짝 떨어지게 하는데. 다소 평면적인 느낌이 보는 이로 하여금 이다가 마주한 두 세계의 대립을 명확히 알아채게 한다.
우리 인간들의 실제 삶은 물론 이보다 혼란스럽다. 각자가 마주한 두 세계가 분리된 듯 섞여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경험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다처럼 경험한 후에야 알게 된다. 무엇이 ‘나의 세계’인지를 아는 것보다는, 어떤 것이 ‘내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숙한 질문,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내가 아닌 것’들을 통해서 찾게 된다. 경험만이 진정한 앎이다. 내가 이미 경험한 것을 내어 놓을 때 나는 비로소 성장한다. 내가 이미 맛본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버리고, 이미 그것들이 나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일 때 인간이 성스러워진다. 성스럽다는 뜻은 아마도 혼돈의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갖춘다는 것일테다. 자아에 가까워질 때, 바야흐로 환난이 지나간다.
어느 웹툰 작가가 SNS에 올린 글이었다. ‘방금 무단횡단을 하는 와중에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보았다. 인간이 이토록 복잡한 존재다.’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참으로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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