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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숲에서 J에게

이준건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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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J에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늦은 밤, 혼자서, 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왜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곤 해. 그럴 때 너는 “무슨 그런 생각을 해? 피곤하게.” 라고 말하곤 하였지. 혼자 고상한 척하며 생명이니 죽음이니 논하는 내 모습을 직접 마주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그래도 너는 비웃지 않고 항상 그렇게 일깨워줘서 고마웠어.

부슬비가 한 차례 내려 숲보다 더 숲 같았던 비자림은 얼핏 캄보디아랑도 닮았어. 내가 예전에 캄보디아 갔다 왔다고 말했잖아? 아, 그런데 너는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음, 묘사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혹시 이끼를 자세히 관찰해본 적이 있어? 돌이 새까매질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끼들 말이야. 비자림은 딱 그런 느낌이야. 다만 그 규모가 돌에 붙어 있는 이끼 수준이 아니라, 숲 전체가 비자나무를 비롯한 온갖 식물들로 가득해.

   
 
   
▲ 여기 있는 나무들은 대부분 100년을 가볍게 넘기는 나무들이기 때문에 왠지 위엄이 넘쳐 보여.

아, 무엇보다 비자림은 붉은 길이 인상적이야. 처음에는 숲의 혈관 같다고 생각해서 조금 께름칙했지만, 걷다 보니 길과 나무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비자림의 초록빛은 어떤 색이라고 하면 좋으려나. 날씨가 그리 쾌청한 게 아닌데도 잎사귀들이 빛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투명하고 맑은 초록이라고 쓰면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으려나.

   
▲ 비자림의 잎사귀는 맑다거나 투명하다는 말이 잘 어울려.

다리가 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의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새천년비자나무에 도착했어. 820여 년 동안 자라나 국내외 비자나무 중 최고령을 자랑한다는 새천년비자나무. 소개 리플렛에서 볼 때는 잔뜩 기대했는데 막상 가까이 가 보니 별 거 없더군. 사실 그렇겠지, ‘그래봐야’ 비자나무인데 뭔가 엄청난 게 있겠어? 다른 비자나무들보다 조금 더 굵고 크고 풍성할 뿐, 특별한 건 없었어. 그래서 약간의 실망감을 가라앉힐 겸, 땀이나 식힐 겸 비자나무 앞 벤치에 앉았어. 나랑 느낀 게 다들 비슷했는지 “이게 새천년비자나무라고?”라고 말하는 일행들도 있더군. 애초에 비자나무는 100년을 자라도 지름이 20cm를 넘기기 힘들기 떄문에 800년을 자랐다 해도 아파트 높이만큼 높을 순 없겠지.

   
▲ 새천년비자나무야. 덩그러니 서 있는 게 사진만 봐도 조금 실망스럽지 않아?

그런데 벤치에 앉아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비자나무가 있더군. 동그랗게 이어진 산책로 앞에 딱 하나 커다란 비자나무가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 앉아서 비자나무를 구경하려니까 비로소 이 나무가 참으로 크구나, 싶더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100년을 넘어도 20cm 이상의 지름을 가질 수 없는 나무가 이렇게까지 크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또 이렇게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까? 800년 전이라고 하면 조선이 개국하기도 전에 심어졌다는 건데 말이야.

   
 

새천년비자나무를 뒤로 한 채 비자림을 빠져나오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어. 삶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그런 걸 살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보긴 해야겠지. 하지만 네 말처럼 그런 걱정을 매일 하고 사는 건 정말 좋지 않은 거야. 어쨌든 그런 걱정을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무엇보다 저 오래된 고목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정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겠지. 사실 비자나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어. 상쾌한 피톤치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나보다 100배 이상은 더 산 비자나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다고 비자나무가 엄청 경건해보였다거나 엄한 느낌이었던 건 아니야. 다만 한결같은 색깔로 항상 거기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듬직한 느낌이 드는 거 있지. 마치 어릴 때 나를 돌봐주던 할아버지께서 항상 허허 웃고 계셨듯이 말이야.

   
▲ 비자림에서 나가는 길목에 돌담길이 있어. 여기도 예쁘니 꼭 들려보길!

비자림/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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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건 기자
seawhale98@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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