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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Accepted의 포스터 | ||
[Intro]
패션에는 ‘20년 주기설’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20년 전의 룩이 현대에 와서 다시 유행한다는 패션 트렌드의 오묘한 경향성을 말한다. ‘20년 주기설’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주기’라는 규칙성이나 운명론으로 결정짓는 것 같아 다소 불쾌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90년대 패션(+음악)이 한순간에 우리의 패션을 휘어잡은 점,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복고’라는 말이 가리키는 시대가 60, 80년대에서 90년대로 바뀐 점을 생각하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20년 주기설’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20년 주기설’이 한낱 끼워 맞추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패션계에서 최초로 ‘올블랙’이 등장한 시대가 90년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스냅백과 버킷햇, 뉴 잭 스윙도 모두 90년대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조금 찜찜하지만 – ‘20년 주기설’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 소개할 영화 ‘Accepted’는 2006년에 만들어져 촌스럽기 짝이 없는 영화다. 20년이라는 거대한 원을 한 바퀴 돌아서 온 문화가 다시 각광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Accepted는 만들어진지 딱 10년이 되어 우리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다. 20년 주기설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현재 유행하는 문화나 그 문화의 감성으로 비추어 봤을 때 패션부터 스토리 구성까지 촌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아직 완성시키지 못해 웅얼거리고 있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목소리’와 어딘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힙스터들의 감성, 촌스럽기 짝이 없다고 무시 받던 90년대 문화가 한순간에 트렌드를 휘어잡은 이 시기, 점점 다양한 문화들이 고개를 들고 있는(반대로 고개가 꺾여가는 문화도 많은 게 문제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 우리는 이제 갓 촌스러워진 영화 ‘Accepted’와 알 수 없는 접점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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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인공 바틀비와 가짜 학장 | ||
[Verse 1] 줄거리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독특하다. 지원한 대학교에 모두 떨어진 ‘바틀비 게인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가족들에게 낙방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게인스와 친구들은 이웃 간의 모임에서 자신들의 부모님이 무시 받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들의 열등감과 실망감을 고스란히 질책으로 받는다.
게인스는 고민 끝에 명문 사립대 ‘하몬 대학교’에 입학을 허락받은 친구 셔먼에게 ‘사우스 하몬 대학’이라는 가짜 대학교 홈페이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홈페이지에서 지원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축하드립니다. 합격되셨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뜨도록 조작한 뒤 게인스와 친구들은 부모님에게 이를 보여주며 자신이 ‘사우스 하몬 대학’에 입학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그 순간 부모님들은 처음으로 웃으며 자식들을 껴안아준다.
하지만 거짓말을 통한 안도감도 잠시, 부모님들은 처음 들어보는 ‘사우스 하몬 대학교’를 방문해보고 싶어 한다. 게인스와 친구들은 버려진 정신병원을 개조해 가짜 대학을 만들고, 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게 투철해 교육직에서 해고당한 셔먼의 삼촌을 가짜 학장으로 앉힌다. 우여곡절 끝에 지나간 학부모 방문과 학장과의 면담 후 게인스와 친구들은 새로운 문제를 겪는다. 바로 ‘사우스 하몬 대학교’ 사이트를 폐쇄시키지 않아 학생들이 진짜 대학교인 줄 알고 ‘사우스 하몬 대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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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병원을 개조해서 학교로 만드는 장면 | ||
대학교로 위장된 정신병원 건물에는 학생들이 몰려든다. 거기서 게인스는 학생대표를 맡아 학생들을 속이며 학교를 운영해간다. 엉터리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회의 인정을 받는다는 행복감에 젖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명문대 하몬 대학교는 사우스 하몬 대학교의 존재에 의심을 품으며 접근한다. 그리고 결국 사우스 하몬 대학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학교임이 밝혀지게 된다. 이에 맞서 게인스는 사우스 하몬 대학교를 정식 대학교로 등록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모은다. 귀여운 결말과 그 속에서 전해지는 잔잔한 울림은 여러분이 직접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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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우스 하몬 대학교의 수강신청 : 벽에 원하는 수업을 낙서하기 | ||
[Verse 2] 접점
이 영화는 ‘진정한 교육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영화의 엔딩 부분에서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창의력과 열정을 키우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대사는 교육의 본 목적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비판성’에 있다. 지식 그 자체는 혼자서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굳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이유는 그것을 비판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비판성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를 굳어가게 만드는 것들을 골라내어 개선할 수 있고, 반대로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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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려나지 않기 위해 테두리를 간신히 넘어 들어와도 그 안에는 또 다른 테두리가 있다 | ||
그 점에서 Accepted의 ‘사우스 하몬 대학교’는 교육의 목적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사우스 하몬 대학교는 학생들이 각자 원하는 분야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세상이 규정해놓은 ‘훌륭함’과 거리가 멀어도 자신의 모습 그 자체로도 훌륭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나간다. 이 부분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학교에 느꼈을 아쉬움일 것이다. 세상은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종종 사람들을 밀어낸다. 하지만 가끔은 예술이나 인문학처럼 – 그 분야에서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야를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밀어낼 때도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밀어내는 때도 있지 않을까?
물론 개인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방법으로 노력을 하지 않고서 사회를 탓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문제를 사회에 전가시키려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사회’에 중점을 맞추면 – 세상은, 아니 적어도 교육만큼은 그 사람들을 포용해서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를 외치는 사람들, 촌스럽다고 밀려났던 90년대 문화가 2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 때, 점점 수많은 문화들이 고개를 들고 있는 한국 –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지금 촌스러워 보이는 Accepted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는 사람들을 밀어내기 전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긴 적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밀어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것’들은 90년대 문화처럼 우리의 일상을 바꿀 무언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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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문대에 들어간 친구 ‘셔먼’은 입시경쟁에 성공하지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 ||
덧붙여서, 얼핏 보면 사우스 하몬 대학교가 학생들을 세상에 적응시키는 일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세상과의 소통이나 사회에 발맞춰 나가는 것과는 담을 쌓고 자기들끼리만 행복하게 지내는 ‘괴짜들의 나라’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적응하는 방법’만으로 한 개인이 소통과 적응을 해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사우스 하몬 대학교의 학생들은 ‘적응하는 방법’이전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결여된 사람들이다. 세상에 짓눌려 이미 자신들의 모습이 사라진 그들은 ‘나’가 없기에 ‘방법’을 배워도 소통과 적응을 해낼 수 없다. 그 점에서 사우스 하몬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가장 적합한 소통과 적응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Skit] 아쉬움
감상자는 가볍고 코믹한 스토리 속에서도 작가 혹은 감독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실제로 가볍거나 코믹한 스토리에서 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 작품도 많이 있다.
Accepted는 코믹한 스토리로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관객들의 미소를 짓게 한다. 하지만 스토리 자체보다는 메시지에 끌려서 영화를 봤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메시지를 대변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심지어 후반부에 가서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모든 메시지가 전달되는 점에서 보면 Accepted의 주인공은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보다 감독의 목소리에 훨씬 가깝게 다가가 있다. 하지만 Accepted의 문제는 스토리의 흐름이 다소 흔하다보니 영화에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메시지를 대변하는 정도가 클수록 영화의 몰입도는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이 주인공에게 공감하며 메시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심장으로 공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스토리로 메시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는 성공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눈에 뻔히 보이는 결말을 설정함으로써 메시지 전달을 방해해야 했는지는 조금 아쉽다. 일부에서 Accepted의 이런 아쉬운 점을 두고 흥행성에 초점을 맞추느라 정작 중요한 메시지 전달을 방해했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Outro]
20년 주기설을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10년 전의 문화를 촌스럽게 생각한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 10년에 한 번씩 촌스럽다고 생각되는 문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 우리는 지금 촌스럽다고 멀리하는 그 문화를 다시 천재적이라며 반길 것이다. 반대로 지금 우리가 천재적이고 세련되었다는 지금의 문화를 우리는 10년 뒤에 촌스럽다며 멀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처럼 보인다.
과연 문화에서만 그럴까 – 문화는 사람들의 흔적이고 그림자다. 우리는 그 문화에 걸맞은 사람들도 10년에 한 번씩 싫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 Accepted는 넓은 의미에서 이러한 점을 다루고 있는 영화였다.
처음에 말했듯이, 만들어진지 10년이 되어 촌스럽기 짝이 없는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맹점이자 딜레마를 꼬집고 있다. 사람을 향한 메시지는 시대와 문화를 넘나들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들끼리 기준을 세워놓고 그 테두리 밖의 사람들을 모조리 밀어내는 인간의 고질적인 풍조가 주기도 없이 우리의 곁에 있어왔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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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주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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