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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푸르른 날에> 포스터 | ||
[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5월 16일, 7시 공연이었다. 늦지 않으려고 일부러 서둘러 6시 30분까지 도착했다. 남산예술센터를 자주 이용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공연이 시작하기 30분 전인데도 그렇게 북적인 것은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이나 사진기를 들어 자신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행여나 그들의 사진에 등장할까 싶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가판대에서는 노란색 손수건을 팔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왠지 나뭇가지에 붙들어 두면 어울릴 법한 노란 손수건. 한 장 사서 가방에 넣었다가, 극장 안으로 들어가 다시 꺼냈다. ‘눈물 많이 흘릴 거야.’라고 추천하며 조언해준 누나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줄거리는 신파극의 전형이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고 아주 간단히 요약할 수도 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승려 여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여산에게 딸의 결혼 소식이 날아온다. 암자에서 홀로 수행 중이던 그는 과거를 회상한다. 한때 선생으로서 야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던 (훗날의 여산) 민호는 찻집의 아르바이트생인 정혜와 사랑을 나눈다. 함께 야학하던 정혜의 동생인 기준 역시 그런 민호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면서 민호와 정혜의 인연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정혜의 동생인 기준을 따라 도청을 사수하던 민호는 혼자 살아남게 되고, 고문을 당하던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당시 도청을 사수하던 사람들을 매도한다. 결국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에 걸리게 된 민호는 일부러 정혜를 밀쳐내며 삶을 포기하려고 하지만, 우연히 일정스님을 만나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민호와 정혜의 딸인 운화는 민호의 형인 진호가 거두었으나 마침내 운화가 결혼하게 되자, 이제는 여산이 된 민호는 인연의 울부짖음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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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호는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린다. | ||
으레 연극이 그러하듯, 공연장은 하나였지만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은 여러 갈래였다. 보성과 광주, 서울이 연달아 등장하기도 하며 도청이었던 곳이 작은 암자의 식탁이 되기도 하고, 무서운 고문장소가 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가 이리저리 교차하는 연출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기도 하지만) 감탄할 만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역사 속, 사랑 한 조각
공연을 보며 두 번 울었다. 첫 번째로 울음을 터트린 부분은 기준과 민호, 그리고 광주의 사람들이 도청에 모여 민주화항쟁을 외치는 장면이었다. 흔히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면 보는 감동이 떨어진다고들 하던데, 이미 역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감정의 요동침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슬펐을 지도. 삶의 죽음을 앞두고도 역사의 의미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알고서 그렇게 싸웠던 걸까? 비록 연극이었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한 장면을 체험한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가슴 떨리고 슬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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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호의 형, 진호 역시 정혜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그는 동생을 위해 정혜를 포기한다. 이 또한 사랑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 ||
두 번째로 눈물이 난 장면은 연극의 마지막이다. 어쩌면 이 연극을 ‘신파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기인할 테다.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상상 속으로 이루는 장면은 얼마나 슬픈 아름다움인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헤어져야만 한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아픈 추억으로 기억될까. 연극을 보며 놀라운 점은, 흘러가는 시대와 역사를 아주 무심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시간은 담담히 흐르고 역사의 의미는 무색무취로 표현된다. 절대 시대적 상황이나 광주라는 공간에 커다란 상징성을 담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아주 우연히, 시대를 잘못 만나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말투로 서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당시의 비극을 더 돋보이게 했다. 모두가 시끄럽게 떠드는 곳에서 나직이 말하는 목소리가 더 명확하게 들리는 이치라고나 할까.
광주의 학살이 있은 지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때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던 순간에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은 구했으나) 역사의 비겁자가 되었다. 그것이 이 연극의 서사이고, 연극에 등장하는 비극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을 나누며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다. 그러니 5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얼마나 푸르른 날이겠는가. 광주의 찬란한 슬픔의 푸르른 날이 없었더라면 이같은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고선웅 연출가가 말했듯,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처럼 사랑하자!” 슬픈 푸르른 역사를 잊지는 않되, 푸르른 날처럼 사랑하는 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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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처럼 사랑하자.” | ||
일정: 4.29~5.31 평일 오후 8시 / 주말 오후 3시·7시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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