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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아티스트매거진] AUDREY HEPBURN | ||
[디아티스트매거진=은서형] 지금으로부터 딱 86년 전 오늘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부유한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남작 가문 출신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한 어여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후에 자신이 부모님의 공주만이 아닌 전 세계인의 공주가 될 거란 것은 꿈에도 모른채로. 더 나아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보다 더 고운 그녀의 마음씨로 빚은 선행 덕분에 오래도록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될 거란 것은 꿈에도 모른채로 말이다.
그녀의 이름,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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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DREY HEPBURN | ||
전 세계에서 세대를 뛰어넘어 어머니와 딸이 모두 좋아할만한 여배우라면 누가 있을까? 필자는 단연, 오드리 헵번을 꼽을 것이다. 그녀는 외적으로 여성이 갖춰야할 우아함과 스타일을 지녔으며 ‘오드리 스타일’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패션 스타일로 명사가 된 배우이다. 나아가 내적으로 여성으로의 삶, 배우로의 삶을 사는 지혜를 갖췄으며 보다 더 중요한것은 ‘오드리’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마지막 스위스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멋지고 충만하게 살다 간 배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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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 런던 외곽의 기숙학교에 갓 적응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그녀는 아버지와의 이혼 후 싱글맘이 된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이 목숨을 걸고 탈출했으며 우리는 마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고 고백하였다. 집, 재산, 돈, 그리고 가장 소중한 가족,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이 몇 백 조각으로 찢겨질 수 있음을 전쟁 중에 느꼈다고 고백하였다. 열한 번째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맞았던 전쟁은 그녀가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을 즈음에 끝이 났다. 어린 그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전쟁은 그녀에게 잔인한 상흔을 남겼지만 그녀가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자신의 삶에서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2살에 나이에 배우기 시작한 발레는 그녀에게 전쟁을 잊게 해주는 하나의 여흥거리였다. 제2의 안나 파블로바가 되기를 꿈꾸며 시작한 발레는 당시의 혼잡한 전시상황과 경제적 여건, 굶주림으로 인해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야 발레학교에 입학하여 발레를 배웠다. 그러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그녀는 마냥 춤만 추고 있을 순 없었다. 그녀는 돈을 필요로 했으므로 뮤지컬을 비롯한 여러 쇼에서 공연을 해야만 했다. 모델 일과 영화 계에도 종종 얼굴을 비추며 무명으로 단역 활동을 했지만 빛을 보진 못했다. 그러다 22살의 나이에 <몬테 카를로 베이비> 의 촬영현장에서 각본가의 눈에 들어 그 유명한 “나의 뮤즈 ‘지지’가 여기 있군!” 이란 말을 듣고 뮤지컬 <지지>에 캐스팅이 되어 뉴욕 브로드웨이행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녀가 브로드웨이로 떠나기 위해 가방을 쌀 무렵 감독 윌리엄 와일러로부터 ‘당신을 공주로 만들겠다.’ 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바로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 에 캐스팅 확정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녀에게 행운의 번개가 2번이나쳤다. 이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전 세계의 팬의 공주가 되었으며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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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촬영 현장에서의 오드리 헵번 | ||
그 후 그녀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계속 쌓아갔다.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1956년 영화 <사브리나 Sabrina>, 1959년 <파계 Nun’s story>, ‘헵번룩’을 탄생시킨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 를 비롯하여 많은 영화에 그녀는 출연하였다. 기자들은 계속 연서(戀書)와도 같은 기사를 썼으며 많은 남자배우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그녀는 성공한 화려한 여배우의 길에 올랐고 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다. 전쟁 중에 혹독한 생활고와 굶주림을 견뎌내야 했던 그녀가 후에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되었다는 것은 마치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이다. 그녀도 자신의 삶을 ‘완벽한 수수께끼’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 앞의 수식어 ‘영화배우’를 떼어내고 그녀의 삶, 사생활을 돌아본다면 그녀도 우리와 같은 걱정을 하며 살았다. 그녀도 인생에 큰 골로 남는 아픔을 겪었다. 2번의 결혼은 남편의 바람으로 인해 이혼으로 파국을 맞은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웠으며 아들을 갖기 전에 유산도 경험하였다. 또 그녀가 어릴 적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다. 전운이 도는 시점에 가족을 버리고, 그녀를 버리고 떠나갔다는 어릴 적의 기억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큰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에게 무척이나 헌신적인 여자였다. 가정에서는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자신이 영화를 찍는 동안 홀로 있을 아들을 위하여 십 년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가족이 과거 자신에게 준 아픔을 딛고 현재의 그녀의 가족에게 헌신과 사랑으로 보답할 줄 아는 여배우이기 이전에 가슴 따뜻한 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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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세프’ 활동 당시 오드리 헵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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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이 받은 사랑과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과거 그녀와 함께 일했던 연기자, 친구, 지방시 디자이너 그리고 함께 일했던 스태프의 입을 통하여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하여 증명되었다. 그녀의 이런 마음은 그녀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부드러워질 때에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과거 전쟁을 겪었을 적, 유니세프에서 받은 구호물품을 비롯한 도움을 잊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이에 보답하고자 또 자신의 도움을 기다리는 빈국(貧國)과 그 곳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돕고자 ‘유니세프’의 선행 홍보대사로 선정되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전 세계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알리고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유니세프의 인지를 높이고 자선기금을 모으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으며 유니세프 미국 지부는 자선기금 액수를 거의 두 배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공로로 1992년 미국 의회의 최고시민상과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을 수상하였다. 혹자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이 무모하며 소용 없는 일이라고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세상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참상은 너무 비참하여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중 아무도 홀로 이를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변화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이는 반드시 우리가 이룩해야 하는 숙제이다. 어린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고 평화를 지킬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는 유니세프’와 전 세계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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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DREY HEBURN | ||
많은 이들은 그녀의 모습을 대부분 영화속의 역할로 기억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의 발랄하고 어여쁜 ‘앤 공주’,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에서의 까만 썬글라스를 낀 시크한 모습의 ‘홀리 골라이틀리’, <사브리나>에서의 ‘사브리나’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에서 그녀가 눈을 감은지 어언 12년이 지났음에도 그녀를 계속 추억하는 것은 비단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 때문은 아니다. 매혹적인 여배우들은 시대를 통틀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외모 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녔으며 이를 보여주었다. 가족에 대한 헌신, 여성으로서 자신의 외모의 변화에 조바심 내지 않는 태도,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능력, 삶의 지혜 등 쉬우면서도 온전히 갖기 어려운 것을 그녀의 삶을 틀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보여준 ‘세계에 대한 박애정신’ 일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불태운 초처럼 뜨겁게 살다 떠났기에 많은 이들이 그녀를 오늘날까지 가슴 깊이 추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가 직장암으로 93년 1월 20일 향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뉴욕 타임즈>가 그녀의 삶을 추억하며 적은 사설을 끝으로 칼럼을 마치겠다.
“데뷔하고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자 오드리 헵번의 얼굴은 태양 앞에 찌푸리고 웃을 떄 웃고 눈물 흘릴 때 눈물 흘린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주름이 있었고 눈가에는 더 많은 주름이 있었으며 날카롭던 턱선은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풍만함을 가장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젊음을 가장하지 않았고 실제 나이인 63세처럼 보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제 나이가 아닌 척하는 그 어떤 여성보다 더 멋지게 살아온 셈이다. 그녀가 우리 곁에 더 머물러 우리 모두에게 나이 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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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촬영장에서의 오드리 헵번 | ||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을 즐기는 것이다.그것만이 중요하다.”
– ‘오드리 헵번’
(오드리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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