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전준호 X 그의 거처 | ||
[디아티스트매거진=신소영] 거울 위에 목각 해골이 엎드려 있다. 순간 해골이 타는 줄 알았다. 오븐에 구워지는 닭처럼 조명이 거울에 반사되어 태워지는 해골. 갈색의 뼈가 나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오븐 속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났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왜소함과 앙상함이 나무의 결을 따라 흐르고 거울을 통해 확장된다. 해골이 나를 압도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거울 조각을 이어붙인 조형위에 해골이 아니 어쩌면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 엎드려있다.
나는 묘향 산관을 보면서 해골을 계속 생각했다. 그는 왜 소재로 나무를 선택했을까? 북한 레스토랑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을 보며 미술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고 그게 재능을 장작삼아 자신을 태워 없애는 작가의 모습으로까지 이어졌다. 뜨겁게 데워진 오븐 속처럼 현실은 고통스럽고 그 속에서 수분을 증발시키듯 자신을 바싹 말려 그림을 그린다. 영화 속 주인공은 5년 동안 두 작품밖에 그리지 못한 작가이며 한국 미술계에 신물이 나 있다. 그래서 중국으로 도망쳐 나와 그림을 그리고 북한 레스토랑에 들락거리며 여성 동무에게 바람을 쐬러가자고 말한다.
그 외에 경계를 대하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경계에 매달린 커다란 원형과 무언가를 관통하는 다양한 크기의 모형들과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파도의 물결을 본다. 파도와 하늘을 담은 영상은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일렁이는 경계를 담고 있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그의 거처’ 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엎드려 있는 해골을 마주보았고 ‘마지막 장인’이 만들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어졌다.
당신의 거처는 완전한가요?
그의 거처에서 뼈만 남은 마지막 장인은 거울 위에 올라 사죄하듯이 엎드려 있다. 나는 어쩌면 거울조각들이 장인의 잘못들을 비춰주는 매개체로서 형상화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적나라한 거울들이 모여 그의 잘못을 비춰주며 뜨거워진다. 그 앞에 놓인 장인은 후회의 고통으로 달궈지며 자신의 살을 태우듯 반성한다. 오븐 속에 있는 닭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름기가 빠지고 담백해진다. 그것처럼 장인은 어쩌면 기름기를 짜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했던 건 아니었을까.
물과 밀가루와 계란을 섞어 반죽하듯 장인은 작품들을 만들고 그것들이 빵 부풀어 오르듯 구성되어지면서 비평이 남는다. 그게 그에게 돌아오고 그것을 먹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이다. 어떤 비평은 달고 어떤 것은 쓰고 어떤 것은 도저히 삼킬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게 뼈 위를 덮은 살처럼 본질을 가리고 뼈의 온전한 형태를 볼 수 없게 만들었을 수 도 있다. 그걸 바라보는 장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장인이 느꼈을 뼈를 깎는 고통이 나무를 깎은 해골로 탄생되어 거울 앞에 놓여 진 거라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그가 느꼈을 본질을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 이다. 멋대로 뼈 위에 살을 붙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경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 마지막 장인이 원했던 것은 아닐까.
![]() |
||
| ▲ 전준호 X 그의 거처 | ||
뼈를 발라 살을 먹듯 예술이라는 닭에서 상업적인 이익만을 발라 먹는 자본주의의 식성이 느껴진다. 자본이 가진 식성의 영향력이 어떻게 예술계를 요리하는지, 그래서 한국 예술계를 어떻게 말아먹는지 볼 수 있다. 목조는 쉽게 변형이 가능하다. 뒤틀리기도 하고 부러질 수도 있으며 타서 없어질 수도 있다. 초심도 이렇게 쉽게 변질 될 수 있다. 본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것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거울 앞에 엎드린 마지막 장인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장송곡이 들려오는 듯하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