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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패션](1) 이브 생 로랑이 예술을 보는 창

김민준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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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김민준] 글에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시리즈를 짤막하게 소개해볼까 한다. 발견된 패션은 ‘발견된 오브제’ 의 오마주로 진행하는 칼럼 시리즈이다. 발견된 오브제가 일상용품이 새로운 예술적 지위를 부여받아 탄생한 용어라면 발견된 패션은 작금의 동시대 패션에 대해서 예술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즉 교과서적 교육으로 형성된 상업과 순수예술의 경계가 이제는 무의미해 졌고, 패션에 시각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게 된 현재. 브랜드에 대해서는 알지만 주역들의 철학에 대해서는 접근하기 힘든 일반 대중들이 많다. 이번 시리즈는 시각예술로서 패션의 철학에 대해 좀 더 깊은 사유를 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리고 쉽게 접근 가능한 칼럼이라는 일상적 매체를 이용하여 일반 대중이 보다 용이하게 예술적 접근으로서 ‘패션’ 을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이드라인 성격의 글이다. 이 점을 주목해서 글을 읽는다면 복합적 의미에서 ‘패션’ 을 몸소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1961년 그래픽 디자이너 아돌프 무롱 카상드르(Adolphe Mouron Cassandre) 에 의해 디자인된 이브 생 로랑의 로고.

 동시대 패션에서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양식들이 눈에 띄게 녹아드는 것을 마주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1세대 패션디자이너들에게는 예술과 사유를 통한 작품보다는 시대적 고정관념에 얽매여있는 패션의 흐름을 새롭게 주도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트쿠튀르를 넘어서 *프레타포르테의 흐름을 이끌었던 디자이너가 있다. ‘오트쿠튀르의 황태자’, ‘프레타포르테의 선구자’ 등 패션 자체에 시선한 파급력을 선보였던 이브 생 로랑(1936-2008). 시대적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을 비롯하여 그 만의 예술을 보는 창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 왼쪽부터 이브 생 로랑(1936-2008), 이브 생 로랑이 1958년 발표한 트라페즈 라인.

이브 생 로랑의 크리스찬 디올

 전 세계적 문화, 예술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가 다가오기 3년 전 1957년 파리. 그 해 파리는 만감이 교차했던 때였다. 샤넬과 더불어 명망이 드높았던 크리스찬 디올의 돌연 사망의 슬픔 속에서 21세의 젊은 디자이너가 디올의 후임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어린 나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그는 그를 둘러싼 우려를 빠르게 종식시키기 이른다. 우선 그는 1955년부터 디올의 조수로 일하면서 쌓아온 커리어뿐만 아니라 각종 디자인 대회에서 심사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것을 바탕으로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1958년 트라페즈 라인(어깨라인의 폭이 넓고 아래로 갈수록 실루엣이 넓어지는 스타일)을 발표한 것은 가장 결정적인 일로 손꼽힌다. 전통과 혁신, 시대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돌파해버린 그의 디자인은 세간의 우려를 확실히 종식시킨다.

   
▲ 이브 생 로랑이 추구했던 스트릿패션의 단면.

 1962년 이브 생 로랑이 디올에서 독립하기 이전까지 발표하는 컬렉션마다 그는 극찬을 받으며 활동을 해갔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도 안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에게도 그런 위기가 찾아온 동시에 새로운 전환기가 도래했다. 그 당시 오트쿠튀르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다시 말해 우아하고 화려한 엘레강스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치스럽기 짝이 없고 정형화되는 패션의 답습은 그에게 있어서 지루함의 극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가 쿠튀르에서 시작했으나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부분일지도 모른다. 제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인 50년대 말은 시기적으로 상류층들만의 리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피어난 가난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고 소위 ‘돈 있는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이들은 문화 *프로슈머(prosumer)적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즉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하고 소비하면서 기성세대와의 차별된 흐름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거리에는 각기 각색의 새로운 스타일들이 즐비했고 트렌드 사이클은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브 생 로랑도 이러한 스트릿 패션 문화를 견지하고 즉각 디올 컬렉션을 위해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 위기가 찾아온다. 오트쿠튀르의 정수였던 디올은 상류층 매니아들의 지지가 확고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 반하는 *비트족의 스트릿 패션을 담은 <Souplesse, Legerete, Vie>(유연하고 경쾌한 삶)컬렉션을 발표하기 이른다. 다시 말해 이브 생 로랑의 비트룩으로 대표되는 오트쿠튀르는 상류층들이 좋아할만한 우아하면서 기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세간의 혹평은 그를 포함한 디올의 분위기까지 뒤바꿔놓았다. 마침내 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이브 생 로랑의 디올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의 시작

   
▲ ⓒ이브 생 로랑의 회고전 포스터, www.yslretrospective.com

 동성애자로 유명한 이브 생 로랑은 애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를 통해 디올에서의 위기를 극복할 기회를 찾게 된다. 디올을 위해 헌신했던 생 로랑은 헌신짝처럼 마르크 보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위기 속에 있던 그를 위해 디올로부터 보상금을 받게 힘쓰고 피에르 베르제는 1961년에 본격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브 생 로랑의 단독라인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이로써 그 해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 는 시작되고 1962년에 이브 생 로랑은 그의 단독 컬렉션을 발표한다. 1966년 기성복(Ready to Wear) 라인을 시작의 기점 전후로 수많은 룩들이 쏟아져 나왔다(66년 기성복 라인 발표 이전에는 이브 생 로랑만의 쿠튀르적 감성을 보여줬다). 1963년 그를 샤넬 이후 제 2의 ‘여성 패션의 혁명가’ 라고 부르는 수식어를 증명하는 보이시룩(Boysh look)의 탄생은 남성의 전유물(방수복, 선원들의 피 재킷 등) 이었던 아이템들을 트위드, 새틴과 같은 소재로 부활시키고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를 통해 여성들을 옥죄었던 스타일을 자유롭게 탈바꿈 시켰다. 또한 그의 보이시룩을 통해 우리는 샤넬과의 접점을 살펴볼 수 있다. 샤넬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기 때문일까. 상복에만 사용한 블랙의 고정관념을 타파한 샤넬과 마찬가지로 블랙을 예찬했다는 것과 여성 패션에서 ‘활동성’ 과 ‘자유로움’을 노래했다는 점을 비롯하여 그가 샤넬과의  다양한 접점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 왼쪽부터 오른쪽 상단까지 이브 생 로랑이 1966년 발표한 르 스모킹룩, 오른쪽 하단은 1970년대 에스닉 열풍을 일으켰던 그의 컬렉션.

르 스모킹과 에스닉

패션 역사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일컫는 말이 있다면 ‘이브 생 로랑과 판탈롱’, ‘이브 생 로랑과 에스닉룩’ 으로 명명할 수 있다. 여성을 위한 슈트메이커의 역할을 자처하는 동시에 ‘지구촌’이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이전에 그는 ‘다문화 주의’를 표방한 컬렉션에 노력을 기울였다. 섹션을 나누어 보자면 1966년 독보적 이브닝웨어로 자리 잡았던 ‘르 스모킹 룩(프랑스어로 턱시도)’ 과 ‘에스닉’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르 스모킹 룩은 과장되지 않은 재킷과 자연스러운 주름 디테일의 *자보가 달린 *오건디 셔츠, 하늘하늘한 넥타이. 간결한 실루엣의 바지, 실크 새틴의 부드러운 벨트로 연출한 스타일이다. 이브 생 로랑에게 있어서 르 스모킹 룩은 *바이섹슈얼리티(Bisexuality)의 표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중성적 매력이 어필되고 성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던 시대를 예감하면서 새로운 여성들에게 필요한 슈트를 선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 이국적인 스타일을 표방하는 ‘에스닉 룩’ 을 살펴보자면 그 당시 주목하기 어려웠던 아프리카의 민속 의상, 집시들의 레이어드 스타일을 컬렉션에 선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엘레강스를 강조한 오트쿠튀르 앞에 새로운 도전을 했다. 자연적 소재인 조개껍데기, 동물의 이빨 모양의 디테일들을 사용하여 독자적인 에스닉룩을 발표한다. 이것을 두고 유럽 중심적 패션관의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리고 1967년 아프리카를 바탕으로 시작한 그의 에스닉룩은 1976년 가장 주목받게 되는 러시안 룩으로 인해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즉 종래의 오트쿠튀르가 최고의 재료와 실루엣으로 무장한 엘레강스의 극치였다면 오트쿠튀르 지니는 예술적 감성만을 가져온 채 이국적인 민속 의상들을 재구성한 것은 그가 시대를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르 스모킹룩과 에스닉룩은 그의 패션에서 예술이 어떻게 자리 잡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 왼쪽 상단과 하단부터 오른쪽 방향 순으로. 1969년 이브 생 로랑이 클로드 라란느와 작업한 스타일, 1965년 몬드리안룩, 앤디워홀의
를 재해석한 팝아트룩.

예술을 보는 창

 사실 이브 생 로랑이 예술 작품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패션을 새롭게 정립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예술과의 접점을 이룬 것은 대중적인 시도로 보기는 힘들다. 이브 생 로랑 이전에샤넬과의 라이벌 구도를 지녔던 패션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에 의해서 예술 패션은 전개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브 생 로랑과  차이점이 있다면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예술 패션’이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통해 충격을 줬다면 이브 생 로랑은 정제된 표현을 통한 예술 패션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즉 서로가 예술을 보는 견해가 달랐고 마주한 예술가들도 다르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브 생 로랑이 예술을 보는 창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봐야할 것이다. 그를 회고하는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에서 볼 수 있듯 우리에게는 차가운 추상이라고 잘 알려진 피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패션에 옮겨 놓은 한 드레스를 발표한다. 그것이 바로 이브 생 로랑의  예술 패션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미우치아 프라다도 오마주한 ‘몬드리안 룩’ 이다. 일반적으로 작품을 옮겨놓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데 의미를 과장해서 부여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간극을 해소할 수 없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그저 프린팅만 했다면 과장된 의미부여라고 인정하겠지만 몬드리안의 극도로 단순화한 추상 작품 무드를 그대로 반영한 형태를 비롯하여 피트 몬드리안과의 직접적 교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몬드리안룩을 시발점으로 1960년대 팝 아트의 선구자였던 앤디워홀과의 교류를 통해 강렬한 색채를 조화시킨 스타일, 1969년 조각가 클로드 라란느와 작업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가슴 형태와 허리 형태를 부착한 드레스를 발표하는 등 존재하는 작품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의 진정성 있는 교류를 통해 자신의 패션관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1982년 12월부터 1984년 9월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진행한 ‘이브 생 로랑: 25년간의 디자인(Yves Saint Laurent, Twenty Five Years of Design)’ 전시는 회고전의 의미뿐만 아니라 패션을 시각예술의 중요한 분야로 등극시킨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브 생 로랑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가 바라본 예술을 보는 창은 바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라고 볼 수 있다. 패션이 가지는 복제성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고 사유하기보다 입고 즐기는 유희적 관점의 ‘의생활’ 이 주를 이루었던 종래의 사고를 뒤엎었다는 점이 진정한 의미의 오리지널리티라고 생각한다. 미술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끝에 발산한 이브 생 로랑의 패션. 창의성이 결여되고 무작정 생산하고 보는 ‘페스트 패션’ 이 주를 이루는 동시대 패션의 이면. 패션을 선도하는 디자이너들에게도, 수용하는 대중들에게도 오리지널리티 패션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예술 작품들은 수많은 경향 속에서도 지위를 굳건히 하며 남아있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브 생 로랑은 21세기 동시대 패션을 견지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의미심장한 문장처럼. “유행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Fashions fade, style is eternal.).”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프랑스어로 ‘고급의상점’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중성뿐만 아니라 예술적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동시대 패션에서 프레타포르테에 비해 대중적 입지는 좁아졌지만 아직까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컬렉션이다.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 프랑스어로 ‘기성복’, 오트쿠튀르에 발표되는 스타일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고급 기성복을 일컫는다. 오트쿠튀르 보다 개방성을 띄고 대중성을 중점으로 둔다.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를 뜻하는 영어 ‘producer’와 ‘소비자’를 뜻하는 영어 ‘consumer’의 합성어.*비트족:1950년대 전후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화된 기성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

*자보(jabot): 셔츠 앞의 주름 장식.

*오건디(organdy): 매우 얇은 피륙으로 가볍고 투명해 보이는 빳빳한 촉감으로 마무리된 면이나 폴리에스테르의 직물.

*바이섹슈얼리티(Bisexuality):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소인 또는 실제적인 성적 행동을 가리키는 용어. 글에서는 성차별적 요소와 중성적 매력 어필의 의미로 사용.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독창성, 글에서는 사전적 뜻을 바탕으로 열린 해석이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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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
lawrencemin@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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