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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언더 더 스킨> | ||
나는 가끔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행동.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 생각한다. 나는 누굴까?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어제의 나는 누구였을까? 그럴때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조나단 글레이져 감독의 영화 <언더 더 스킨>은 행간이 무척 넓다. 스코틀랜드의 음산하게 젖은 밤거리, 몽환적인 음악의 리듬 속에 대사도 거의 없이 물 흐르듯이 흐르는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과 몸짓은 관객에게 꼭 짚어 무언가를 이야기해주지는 않지만 긴 여백 속에 많은 화두를 남긴다. 포르노가 선정적인 몸의 대화라면, 이토록 문학적인 몸의 대화는 새롭다.
어느 외계인, 그리고 인간 욕망에 대한 이야기
식량을 찾아 지구로 온 외계인 로라(스칼렛 요한슨 분)는 미인의 탈을 쓰고 남성을 유혹하여 죽음으로 이끈다. 태초의 인간이 훌륭한 열매 채집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외계인 로라 또한 사냥꾼이기 이전에 그처럼 훌륭한 식량 채집가라는 점에서 영화 속 외계인의 모습은 인간과 묘하게 닮아있다. 여기서 인간의 가죽을 쓴 외계인이라는 이 영화의 설정은 달리 말해 외계인을 빙자한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외계인의 식량인 인간의 약점, 그 아킬레스 건은 ‘욕망’이다. 로라는 차를 몰다가 잠시 멈춰설 뿐이고 먹잇감은 그녀에게 스스로 다가온다. 때로는 약간의 수고를 감수해 사냥거리를 물색하고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창을 던지고 화살을 쏘는 적극적인 사냥꾼이기 이전에 부지런히 나무 가지에 걸린 열매를 따고, 때로는 약간의 덫을 놓고 참을성있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욕망에 취약한지 눈 앞의 미끼에 달려드는 물고기와도 같다. 그물 속에 걸려든 물고기는 열심히 포획하는 것, 외계인 또한 실상 인간처럼 그 얼마나 욕망에 충실한지 보여준다. 영화는 외계인의 식욕과 인간의 성욕이 묘하게 교차하는 순간을 마치 어떠한 영화적 장치도 필요없다는 듯이 칠흙 같이 어두운 배경 속에 그려낸다. 그순간 로라가 내뱉은 대사는 실로 단순하고 일관성 있다. “Come to me.” 우리 앞에 놓인 선을 살짝만 넘어가도 늪과 같은 욕망의 홀에 빠지고 만다. 욕망이란 이름의 인간 본능을 보여주기에 가장 효과적인 미끼를 던진 <언더 더 스킨>만의 에로틱한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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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언더 더 스킨> 중에서 | ||
인간의 온기 그리고 외계인의 욕망
인간처럼 사냥꾼 ‘로라’ 또한 선을 넘고만다. 사냥꾼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무엇일까? 바로 먹잇감에 대한 이해, 동정심 그리고 온정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 잡은 고기를 방생하는 것. 로라는 사냥을 거듭하는 사이 다양한 인간을 경험하며 서서히 인간에 동화되어 간다. 장애를 가진 인간, 따뜻한 인간에게 온정을 베풀고 경험하며 인간의 음식을 먹고, 추위에 떨며 안식처를 구하며, 성욕을 탐하는 등 훌륭한 사냥꾼으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채 낙오자가 되고 만다. 탐욕을 미끼로 인간을 거침없이 짚어삼켰던 그녀는 의식주 – 머물 곳과 먹을 것 그리고 입을 것을 주는 인간의 온기 속에 동요되고,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사랑이란 결국 따뜻하고 배고프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다. 그녀에게도 인간의 욕망이 자라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일탈 흔적은 일종의 청소부처럼 그녀를 뒤쫓는 존재들에 의해 지워진다. 포식자였던 외계인 로라는 이제 자신이 꼭대기에 위치했던 먹이사슬에서 이탈해 위태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다. 영화는 인간의 온기를 뺐던 외계인이 인간의 온기 속에 동요되고, 다시 그 욕망에 지배되어가는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운명을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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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언더 더 스킨> 중에서 | ||
내 속의 또 다른 나
로라는 결국 벗겨져 버린 인간의 탈을 스스로 내려다본다. 강렬한 순간이다. 한때 명확한 목적 의식 속에 뒤짚어 쓴 외피, 어느새 나 자신이 되어버린 또다른 자신의 정체성 로라의 모습 말이다. 로라와 로라린지 모를 외계인은 서로 마주본다. 우리는 그 외계인의 실제 이름이 로라인지조차 모른다. 어쩌면 이제 외계인이 바라보는 로라의 얼굴은 바로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표면 속에 순은 ‘나’, 혹은 나라는 사람의 ‘표피’. 어느 것이 ‘나’의 모습일까…… 표리부동한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포식자일 수 있다. 또한 누군가의 먹잇감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원수일 수 있다. 누군가의 질문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말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마음에 품을 수 있다. 반드시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모습이 나 스스로의 본모습은 아니며, 항상 그들과 함께 하는 지구인이지만 그들과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외계인일 수 있는 법이다. 영화에서 로라는 자신의 겉과 속이 일치하는 순간 세상에서 산화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은 꽤나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영화의 결말인 동시에 가장 현실적이고 쓸쓸한 순간이기도 했다. 표리부동의 이 세상에서 허락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응하지 못하고 결국 도퇴되고마는 로라의 운명. 내 피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 속엔 누가 있을까? <언더 더 스킨>은 그러한 화두를 내게 던진다.
영화 <언더 더 스킨>은 문학적이다. 흥미로운 문학에 대한 해석이 그렇듯이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다양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관객에게 다채로운 이야기 거리를 주는 것, 그만큼 대단한 예술적 성취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영화의 가치 기준을 꼭 예술성에 둘 수는 없다. 대중성 측면에서는 난해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향이 논란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취향에 대해 말하자면 이 영화는 곱씹어 보기 좋은 영화다. 보고난 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기에 좋으며 그 대화를 통해 여백과 행간을 채워 가는 재미가 충분하다. <언더 더 스킨>은 그런 즐거움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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