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메뉴 바로가기 (상단) 본문 컨텐츠 바로가기 주요 메뉴 바로가기 (하단)

‘사실의 극치(極致)’로서의 초현실주의

한임연 조회수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Google 검색에서 디아티스트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 르네 마그리트, <골콩드Golconde>, 80.7 x 100.6 cm, 캔버스에 유채, 1953년도

[THE ARTIST 매거진=한임연 에디터] 오늘은 초현실주의 작가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적인 작품 3개를 중심으로 그림 여행을 떠나보고자 합니다. 아마 르네 마그리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어도 좌측에 있는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실 텐데요,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어딘가 모를 괴리감과 어색함, 그로테스크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그리트는 처음엔 패션 광고 등 상업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파리에서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 ․ 문학가들과 더불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초현실주의란 무엇일까요? 아마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만 보면 말 그대로 사실주의와는 정반대되는, 현실에서 벗어난 형이상학적 사조처럼 들릴 텐데요.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초현실주의 작품이 주로 현실의 왜곡된 본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실의 극치’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세밀한 묘사력과 더불어 여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현실 풍자적 작품 역시 사실의 극치로서의 초현실주의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그 이면의 것, 감성을 비롯하여 내면에 숨겨진 어떠한 것을 본질적으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현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실주의와는 뚜렷한 차이를 갖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역시 이 같은 초현실주의적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지요.

딱딱한 이론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마그리트의 그림을 살펴볼까요? 먼저 위쪽에 있는 그림부터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한국의 상업 광고에서도 꽤 자주 패러디되었기 때문에 마그리트의 그림 중 가장 대중적인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역시 이 그림, 특히 중절모를 쓴 신사의 모습은 어디에선가 몇 번 본 듯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실 텐데요, 그도 그럴 것이 마그리트는 이 검은 중절모와 코트를 착용한 신사의 모습을 자신의 다른 여러 작품들에서도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이러한 신사의 옷차림은 마그리트 자신이 평소에도 즐겨 입던 옷차림이라고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위 그림에서 등장하는 신사들은 마그리트의 분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좀 더 전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마치 하늘에서 ‘사람비’가 내리는 것 같지 않나요(오래된 팝송인 The Weather Girls의 ‘It’s Raining Men’이 떠오르네요 하하?) 이번에는 조금 거리를 두고서 이 그림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어쩐지 하늘에서 조용하고도 평온한 시가지에 총탄이 쏟아지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본다면 위 그림은 전쟁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무언가가 ‘내리는’ 혹은 ‘쏟아지는’ 것 같다는 해석은 중력의 개념, 즉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개념에 기반합니다. 초현실주의가 이러한 사실주의적 관념과 사고의 틀을 거부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림 속 사람들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박혀’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공중에 박혀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가져다주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획일화 되고 규격화되어 인간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그저 불특정한 어딘가에 놓인 한 인간의 상실된 정체성인가요? 혹은 그저 권태에 빠져 있는 쓸쓸한 개개인들의 모습을 떠올리시나요? 답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자체가 일체의 룰을 거부하는 사조라는 점에서 독자의 어떠한 해석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 테니까요.

   
▲ 르네 마그리트, <9월 16일Sixteenth of September>, 60x50cm, 캔버스에 유채, 1956년도

그럼 이제 두 번째 그림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니 새벽녘인지, 그저 흐린 오후인지, 아니면 해가 진 직후의 여명의 때인지 모를 배경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 위에 흰 초승달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 어딘가 모를 어색함․기괴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초승달만 없으면 사실 그냥 그저 그런 나무 그림에 불과했을 텐데 말이지요.

나무 역시 마그리트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쓰인 대표 아이콘 중 하나입니다. 이 나무의 이미지에 대해 마그리트가 남긴 말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땅으로부터 태양을 향해 자라나는 나무는 어떤 행복에 대한 이미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나무처럼 부동(不動)상태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움직일 때 나무는 이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다. 동시에 나무는 의자나 테이블, 문짝과 같은 형태로서 다소 불안한 우리의 삶을 관망하는 일종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무는 관(棺)이 되어 비로소 다시 땅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불과 함께 변형될 때에는 공기 중으로 소멸한다.”

마그리트에 따르면 나무는 인간의 삶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사물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인간과는 달리 부동 상태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관찰자’로서 기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른쪽 그림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초승달이 나무 위에 박혀 있는 건지, 아니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나무 뒤에 가려진 초승달을 밖으로 끄집어 낸 것인지 의문을 가져보게 되지 않습니까? 마치 어슴푸레하고도 희미한 배경 속에서도 나무만큼은 자신에 의해 가려진 초승달을 관찰하며 이를 인식하고 있음이 초승달의 위와 같은 의도적인 배치를 통해 드러나는 것 같지 않나요? 약간은 어둡고 희미한 배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진리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기 힘든 우리의 현실을 나타낸다면, 바로 나무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관찰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마그리트가 이야기한 행복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마그리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보이지 않는 진리까지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르네 마그리트는 보통 작품을 먼저 완성시키고 나서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의 제목인 ‘9월 16일’도 사실은 마그리트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의 오랜 친구이자 시인인 루이 스퀴트네르라는 사람이 붙여준 제목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작가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9월 16일이라는 특정일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그려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제목이 작품 자체에 가져다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목은 작품 전체가 갖는 의의를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9월 16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걸까요? 작품이 완성된 시기인 1956년 전으로 하여 약 30여 년간의 기록들을 살펴보니 모두 썩 좋은 사건들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터진 폭탄 사건, 1928년 플로리다를 들이닥친 허리케인, 1940년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하의 독일과 대영제국, 소련의 이란 합공 침략, 1947년 사이타마와 도쿄를 강타한 태풍… 아마 마그리트는 위 작품을 통해 각종 자연 재해 뿐만 아니라 수십, 아니 수천 명의 사상자와 부상자를 야기하는 테러 및 전쟁 등의 인위적인 재해들로 인해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근대사회의 모습, 나아가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하는 불분명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우회적으로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르네 마그리트, , 68.6 x 49.8 cm, 캔버스에 유채, 1964년도

전쟁은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기 생명의 희생을 강요하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한 환상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끔 구슬리기도 합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어쩐지 자신이 더욱 남자다워질 것 같은 느낌, 더욱 멋있어지고 용맹스러워져서 큰 공이라도 세우고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심어줌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쟁터에 나서게 되는 순간 이러한 환상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겐 그저 허황된 꿈에 불과하게 되지요. 이제는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훌륭한 공로를 세움으로써 높은 명예를 얻는 꿈은 고사하고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내는 소망이라도 품어보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허상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마그리트의 <위대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전쟁의 속성을 우회적이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아한 자태와 아름다운 옷을 뽐내는 듯한 이 여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녀의 얼굴 역시 아름다울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되지만, 사실 우리는 꽃으로 가려진 그 실체를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전쟁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세우게 될 공로에 대한 판타지부터 고향과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그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며, 전쟁이라는 것 위에 드리워진 꽃을 치우기 이전에는 누구도 그 실체와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오늘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왼쪽의 그림을 보니 아름다운 옷을 입은 한 여성이 꽃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습니다. 그녀의 옷이나 가방, 들고 있는 양산으로 보아 꽃으로 가려진 얼굴 역시 매우 아름다울 것 같지 않나요? 이처럼 아름다운 여성의 그림이 다른 초상화나 인물화와 갖는 차이점을 굳이 찾아낸다면 그것은 바로 얼굴이 가려져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한번 보실까요? 네, 이 그림의 제목은 ‘위대한 전쟁’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림 자체만 두고 보면 전쟁의 ‘ㅈ’자도 떠오르지 않는데 말입니다. 과연 이 작품은 전쟁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런 제목이 붙어졌을까요?

전쟁은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기 생명의 희생을 강요하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한 환상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끔 구슬리기도 합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어쩐지 자신이 더욱 남자다워질 것 같은 느낌, 더욱 멋있어지고 용맹스러워져서 큰 공이라도 세우고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심어줌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쟁터에 나서게 되는 순간 이러한 환상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겐 그저 허황된 꿈에 불과하게 되지요. 이제는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훌륭한 공로를 세움으로써 높은 명예를 얻는 꿈은 고사하고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내는 소망이라도 품어보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허상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마그리트의 <위대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전쟁의 속성을 우회적이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아한 자태와 아름다운 옷을 뽐내는 듯한 이 여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녀의 얼굴 역시 아름다울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되지만, 사실 우리는 꽃으로 가려진 그 실체를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전쟁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세우게 될 공로에 대한 판타지부터 고향과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그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며, 전쟁이라는 것 위에 드리워진 꽃을 치우기 이전에는 누구도 그 실체와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비록 이 그림이 전쟁에 관련된 그림이라 할지라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믿고 있는 것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들이 과연 정말로 ‘진짜’일까요? 아니, 과연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 진정 존재하기나 할까요?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과연 그것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난 후 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거대한 편견의 덩어리일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저 물리적인 유혈 전쟁 뿐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실체 규명을 위한 과정도 하나의 ‘위대한 전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의 이 작품이 갖는 의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자, 어땠나요?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그 어감이 가져다주는 것과는 달리, 사실상 우리가 사는 현실의 본질을 더 파헤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으셨나요? 이처럼 초현실주의 작품은 현실과 대한 유리가 아닌, 오히려 그 본질에 더욱 가까워지려는 ‘사실의 극치’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작품 속 익숙한 사물들의 낯선 배치를 통해 빚어내는 괴리감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리와 눈에 보이는 단순한 현상 속에 내재된 모순들을 낱낱이 고발하기까지 하지요. 이제는 ‘초현실주의’라는 단어 자체만으로 거부감을 느끼기 보단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우리 삶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관련 기사

author-img
한임연
imyeon@theartist.co.kr

댓글0

300

댓글0

[칼럼] 랭킹 뉴스

  • 당신의 관념을 인버전할 테넷
  • 세계로 나아간 한국영화 Choice 5
  • 2019년 한국영화계 키워드 Choice 5
  • 제40회 청룡영화상 주요 부분 수상 예상 Choice 5 (인물 부문)
  • 여성이 주도한 한국영화 Choice 5
  • 나는 사물이 되고 싶다

당신을 위한 인기글

  •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텔레그램 통해 벌이고 있는 섬뜩한 신종 범죄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텔레그램 통해 벌이고 있는 섬뜩한 신종 범죄
  • 현재 해외에서 한국인 피부를 갖고 논란이 된 이유
    현재 해외에서 한국인 피부를 갖고 논란이 된 이유
  • 한국에서는 평범한데…北 평양 고위층만 쓴다는 귀한 생필품의 실체
    한국에서는 평범한데…北 평양 고위층만 쓴다는 귀한 생필품의 실체
  • 방송일 하기전 SM으로 부터 소녀시대 제안 받은 기상 캐스터
    방송일 하기전 SM으로 부터 소녀시대 제안 받은 기상 캐스터
  • 아버지가 저지른 사기 사건의 공범으로 몰린 여자 아이돌
    아버지가 저지른 사기 사건의 공범으로 몰린 여자 아이돌
  • 100kg 넘던 여고생에서 현재는 화제의 몸짱 글래머 의사로 유명한 이분
    100kg 넘던 여고생에서 현재는 화제의 몸짱 글래머 의사로 유명한 이분
  • 사진 1장에 낚여 하와이에서 사기 결혼한 1,000명의 한국 여성들이 한 일
    사진 1장에 낚여 하와이에서 사기 결혼한 1,000명의 한국 여성들이 한 일
  • 심수봉 또 폭로 목격나와…이번에는 일반인에게 “비꼬며 훈계”
    심수봉 또 폭로 목격나와…이번에는 일반인에게 “비꼬며 훈계”

공유하기

[cosmosfarm_share_buttons url="https://theartist.co.kr" title="디아티스트" align="cente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