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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ckson Pollock, Autumn Rhythm (Number 30), 1950. | ||
[디아티스트매거진=옥세경]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은 반 고흐, 피카소, 모네 등과 더불어 현대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들 중 한 명이지만,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이 글에서는 폴록의 예술을 형태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겠는데,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 하는 두 가지 부분들이 있다. 첫째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에서 진상은 무엇이고 허상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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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nvergence, 1952 by Jackson Pollock | ||
이 부분은 본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현대예술가들은 좋은 “예술이란 이 세상의 거짓 없는 재현이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어떤 형태의 예술이 거짓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가를 고민했다. 둘째는, 이 글에서는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정체성을 개론적으로 설명하는데 필요한 부분들만을 언급할 것이기에 현대 미술의 모든 논쟁을 담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추상표현주의와 관련하여 펼쳐진 현대예술의 미학논쟁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 모두 다루기는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추상표현주의의 핵심적인 특징들만은 명료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추상표현주의의 형식: 평면성의 추구>
미국의 예술비평가인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서양회화가 추상표현주의의 발전 이전까지 아주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으며 그 오류는 회화가 이야기를 서술하려고 했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사실 캔버스 위에 존재하는 것은 물감들의 2차원적인 배열일 뿐인데, 추상표현주의 이전의 서양화가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세계를 캔버스 안에 3차원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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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aphael, Disputa, 1509-1510. | ||
도판 2는 라파엘로(Raphael: 1483-1520)의 성체논의(Disputa) 인데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며 이 그림의 표면 너머에 공간적 깊이가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 3차원적인 세상은 라파엘로가 원근법을 통해 창조한 허상일 뿐이며 캔버스 위에 실재하는 것은 그냥 평평하게 발라진 물감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린버그의 관점에서 라파엘로의 회화는 물감들의 존재와 그들의 평평한 배열을 왜곡하여 허상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장면을 창조해내려고 했기 때문에 순수한 예술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폴록과 미국의 다른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예술적 형식을 이해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 순수한 회화라는 것이 그 그림 속에 실재하는 물감들과 그 배열의 평면성을 최대한 거짓 없이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라면, 2차원에 가까운 표현을 담은 회화일수록 더 순수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평면성에 관한 그린버그의 이러한 주장은 라파엘로의 성체논의 (도판 2)와 폴록의 가을의 리듬 (도판 1)을 찬찬히 비교하여 관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추상표현주의의 내용: 모방의 대상이 없는 그림, 화가의 실존의 증거>
그렇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회화가 어떻게 순수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통찰은 그린버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국의 다른 예술비평가 헤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1906-1978)의 저작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로젠버그에 의하면, 순수한 그림은 “무언가를 그린 그림”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그 자체만으로 자명한 정체성을 가져야만 하며, 그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 자신의 그림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형상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좀더 간단히 설명하면, “무엇인가에 대한 모방”은 그 모방의 작업이 얼마나 정교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하나의 “모방”일 수 밖에 없기에 “허상”이라는 지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 화가가 자신의 그림 속에서 “나무”의 형상을 표현했다면, 그 그림은 나무의 허상일 뿐이지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하나의 진상으로 인식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로젠버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어떤 대상도 모방하지 않는 회화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로젠버그의 주장은 굉장히 역설적인데, 그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화가가 “어떠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모방의 목적성이 없이 그림을 그려야만 순수한 회화가 탄생할 수 있다면, 애초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적성과 분리되어 탄생하게 된 그림은 순수한 그림일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도와 분리되어 일상생활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무늬들은 다 순수한 회화로써의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일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로젠버그는 순수한 미술이란 세상의 진상(혹은 진실)을 표현하는 회화라는 주제에 관하여 좀더 구체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로젠버그를 비롯한 추상표현주의의 사상가들은 프랑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은 인간실존의 증거가 선택의 의지에 있다는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며 세상의 진상과 허상을 실존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조에 공감하고 있었다. 결국 실존주의와 회화의 무모방성의 절충점으로써 로젠버그는 하나의 복잡한 사상을 서술하는데, 그에 의하면 화가는 “캔버스 속에 특정 대상의 형상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페인트와 캔버스를 이용해 선보이는 사람”이어야만 하며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써 만들어진 회화는 화가의 실존의 증거물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점은 “화가의 실존을 그린 것”과 “화가의 실존의 증거물인 것” 사이에는 합목적적인 모방성의 유무에 대한 차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인데, 화가는 캔버스에 자신의 실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캔버스 앞에서 페인트를 이용한 행위를 하는 것일 뿐이며 그렇게 탄생한 회화는 그저 부산물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점이다 .
참고문헌:
1. 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on,” in Art in Theory 1900-2000: An Anthology of Changing Ideas, eds. Charles Harrison and Paul Wood, 2nd ed. (Malden, MA: Blackwell Publishing, 2003), 562-568.
2. Harold Rosenberg, “The American Action Painters,” in Art in Theory 1900-2000: An Anthology of Changing Ideas, eds. Charles Harrison and Paul Wood, 2nd ed. (Malden, MA: Blackwell Publishing, 2003), 589-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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