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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이한솔]
1.
영화를 보고 나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조엘이 겪고 있는 일이 오직 조엘에게만 일어난 일일까. 기억을 지우려 했던 기억을 지운 모두가 그와 같은 수순을 밟았다면. 그가 지우려고 했던 가장 아프고, 그렇기에 가장 소중한 기억들을 되돌아 걸었다면. 종래는 기억을 지우고자 했던 결정을 후회하고 되돌리고자 했다면. 영화에는 다양한 이유로 기억을 지우고자 했던 사람들이 나온다. 아이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부인과 쉴 새 없이 상담 전화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 이들이 그 가장 아프고 가장 찬란한 기억들을 되짚어보며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클레멘타인만은 조엘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되짚으며 그녀는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변해버린 그 모습에, 무심한 말들에 상처받고 그 상처로 변해가는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정말 사랑이 식었고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 기억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목적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목적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을까. 정말 사랑을 잊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2.
라쿠나사의 원칙에 따르면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대상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별을 당하고 그를, 그녀를 잊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다. 보지 않으면, 자꾸 떠올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잊혀 진다.
사랑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면, 가장 먼저 지워야 할 것은 상대방이 아니다. 물건도, 추억도 아니다. 가장 먼저 지워야 할 것은 ‘나’이다. 기억을 지웠음에도 클레멘타인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한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한다. 그것은 클레멘타인 자신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그녀를 만든 것은 조엘이었고, 조엘과 함께 해온 시간들이었고, 그녀였다.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그 사람과 함께 하며 만들어진 현재의 나 자신은 지워지지 않는다. 전체를 다 잊고, 나 자신조차 잊지 않고서야 선별적으로 지운 기억으로 지금의 자신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녀가 정말 조엘을 잊고자 했다면, 그 고통을 감당하면서 그 시간들을 통해 고통을 이겨 내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잊어버린 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고통의 시간도, 즐거운 시간도 끝내는 흘러간다. 그 시간을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이미 우리는 먼발치에 서 있다. 시간들은 쌓이고, 가장 먼 기억들은 서서히 지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지워준다는 이 설정은 사실은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이면서도,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기계가 없이도 기억이 잊혀지는 것을,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3.
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이 있을까. 시간은 흘러가고,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은 초라해지고, 때로는 슬픔을, 고통을 주기도 한다. 행복했던 기억으로 인해 불행해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차라리 이 행복을 몰랐더라면 싶다. 그랬다면 이런 고통도 몰랐을 텐데.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고, 당신은 나를 견디기 힘들어하겠지.” 클레멘타인의 말에 조엘은괜찮다, 고 대답한다. 내게 클레멘타인의 말은 “그런 우리가 다시 사랑해도 괜찮을까?” 라고 들렸다. 괜찮아. 조엘은 괜찮다, 대답했다. 조엘이 단순히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기억을 지운다는 선택을 한 뒤에도, 기억을 지운 뒤에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때에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행복했던 기억들까지 고통으로 기억할 때에도, 그는 클레멘타인을 사랑했다. 다시금 아파질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대하고 기대의 배반으로 인해 따르는 고통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너를 사랑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우린 변할 수밖에 없는데 괜찮을까? 하지만 그 모든 일을 겪어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해도 될까? 라는 질문에 조엘은 괜찮아, 괜찮을 거야, 라고 대답할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마 기억을 잃기 전에도 조엘은 괜찮다고 대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가 괜찮다, 고 말한 것은 결국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을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하여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들은 사랑을 잊는 것이, 지우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변해가는 서로를 다시금 붙잡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하얗게 펼쳐진 눈밭을, 손을 잡고 거닌다.
아픔과 고통은 감정의 상태이다. 감정은 늘 변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들에 비춰 행복했던 기억조차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행복했던 기억일수록 더 고통을 줄 수는 있지만, 그 감정들을 닦아내고 다시 그 기억을 보면, 그것은 그토록 찬란할 수 없다. 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이 있을까. 순간은 흘러가지만 그렇기에 ‘현재’로부터 독립된다. 그렇기에 기억 속의 햇빛은 늘, 늘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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