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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더 파워 메인 포스터 | ||
5년하고도 7개월. 2006일. 48,144시간. 대통령이 한 번 바뀌고 수백명이 침몰하는 배에서 죽고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샀으며 지구 어딘가에선 전쟁이 끝나고 또 어딘가에선 지진이 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한 회사에서 일했다. 첫 직장이었다. 사람들이 2G 폰을 버리고 스마트폰을 사는 속도로 나는 회사에 적응했고 또 그것에 몰입하듯 직장생활에 빠져들었다. 고백하건데 가슴 속 사직서는 입사 첫 날부터 썼다. 물지 않을거면 이빨을 드러내지도 말라던데, 나는 그런 참을성 있는 인재는 못 되어서 몇 번이나 퇴사의 고비를 넘겼다. 내 첫 직장은 국내최대근속년수를 자랑하는 회사였다. 산업군이 치열하지 않아 가족적이고(보수적이고) 정이 넘쳤다. 육체과 영혼을 통으로 맡기기만 한다면 자식들에게 엄하지만 먹을 것 입힐 것은 걱정 안하게 해주는 아버지처럼 안전했다. 이 달콤함 때문에 나는 스스로의 우유부단함과 비겁함, 치졸함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도 사직서를 가슴 밖으로 꺼내질 못했다.
‘더 파워’. 이 연극을 본 다음날 오전, 나는 지하철 창문으로 일상적인 풍경들을 보다 문득 생각했다. 내일은 회사를 그만둬야겠다. 몇 백번이고 생각했던 문장이지만 그 날은 좀 달랐다. 너무 당연해서 어째서 그 동안 계속 다니고 있었는가가 신기할 정도였다. ‘더 파워’가 내가 도움을 청하며 들었던 여타의 책, 강연, 영화들보다 특별히 강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연극은 그저 나귀에 등에 얹힌 마지막 지푸라기였는지도. 그래도 그 연극은 내게 ‘지푸라기’가 되었다. 나귀등의 지푸라기든 물에 빠진 사람의 생명줄이든.
‘더 파워’는 국립극단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며 ‘해방과 구속’이라는 주제로 내건 작품이다. 독일의 연출가 알렉시스 부흐(42·Alexis Bug)가 맡아 현 시대의 자본주의 논리를 세 가지 상황으로 보여준다. 1부 ‘성곽’은 전쟁이 없으면 소비도 없고 소비가 없으면 일자리가 없다는 논리로 전쟁을 계속하는 병사들을 그렸다. 2부 ‘타워’는 다국적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권위와 압제 속에서 부품이 되어가는 회사원을, 3부 ‘구름’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한 공포로 피로 속에서도 스스로를 일자리로 내모는 현대인을 보여준다.
사실 이 연극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예술작품들에 비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직설적으로 토해낸다. 연극 시작부터 연출가 역할을 맡은 배우가 무대에 등장해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대 놓고 이야기한다. 대사들도 관객이 도저히 알아차리고는 견디지 못할만큼 현 사회의 경제적 압제와 그에 짓눌린 현대인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연극 속 현대인은 일상이 흐트러지면 혹은 직장을 잃으면 걸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간과 자유를 돈으로 바꾼다. 성장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무리한 목표를 세우고 가상의 적을 만든다.
연극은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극적인 상황이 나열되는 드라마로부터 탈피한 연극) 형태를 취해 연출가 역을 맡은 배우가 뜬금없이 극 중간에 등장해서 이것이 연극임을 환기시키기도 하고 배우들이 어떻게 하면 이 연극을 관객에게 더 와닿게 만들 수 있을까 무대 위에서 토론하기도 한다. 관객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이 연극이 그들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길’ 시도한다. 어떤 이들에겐 이 연극의 ‘강압적’ 방식이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끓는 물에서 익어가는 개구리에겐 얼음 같은 찬물이 필요할 때도 있다.
연극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제 7시간짜리 작품을 쓰렵니다. 까짓 거 뭐, 10시간짜리로 쓸게요. 여러분을 모두 다 객석에 꽁꽁 묶어놓을 겁니다. 처음엔 이렇게들 생각하시겠죠. 아이구, 웃겨라. 포스트모던한 관객참여공연이군. 그리곤 곧 불평조로 거만스럽게 덧붙이려할 때, 그땐 벌써 확인하게 되겠죠. 어, 이건 진짜 체인이잖아. 나 여기 묶여버렸어! 악몽중의 악몽이죠. 관타나모보다 더 끔찍한 악몽. 극장에서 묶여 있다니 말이죠.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종국엔 여러분이 울게 될 때까지 보실 겁니다.” 관객에게 실제의 ‘체인’을 통해 자본주의적 ‘압제’를 물리적으로 경험하게 한다는 발상은 현실과 가상, 무대와 객석을 무너뜨리는 실험적 연극 양식을 통해서 발현된다. 특히 딱딱한 의자에서 3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신체적 불편함이 ‘실제적 체험’을 관객에게 준다.
실제로 내가 이 세시간짜리 긴 연극을 보던 날, 인터미션 중 나간 사람의 삼분의 일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에겐 이 연극이 남은 한시간을 버티지 못할 만큼 재미없었거나 혹은 진실의 체험이 불편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연극을 끝까지 보았다. 체인이 나를 묶고 그 안에 갇혀 울고 우는 체험을 하면서. 연극이 끝나고 나는 그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본래 내 몸에 묶여있던 보이지 않던 체인은 더 잘 보이게 되었다. 나는 이 사슬을 끓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와 함께 연극을 본 그들도 좀 더 자유로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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