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영화 <써드퍼슨> 포스터 | ||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동화책을 끼고 사는 내게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면서도 잠들기 전엔 꼭 옛날이야기를 해줬다. 할머니 교육방식은 독특해서 햇님달님이나 혹부리 영감 같은 흔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어제 티비에 나온 사건 혹은 뒷집 배밭 이야기로 시작해 할머니의 창의적인 생각으로 결말을 맺었다. 전봉준을 실제로 봤다고도 했고 그가 앉은 자리에서 뛰면 3척을 넘게 뛰었다고도 했다. 전봉준은 책에서 본 이름이었지만 할머니 이야기는 책과는 다르게 도깨비도 나오고 산신령도 나왔다. 전봉준이 진짜인지 산신령이 진짜인지 그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몰라 더 재미있었다.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 속에서 나는 할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 |
||
| ▲ 영화 <써드퍼슨> 포스터 | ||
영화 <써드퍼슨>의 감독 폴 해기스도 이야기꾼이다. 각본과 감독을 둘 다 하면서도 둘 다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몇 안되는 감독이다. <밀리언달러베이비>로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크래쉬>로 각본상도 수상했다. 그의 영화들은 연출도 훌륭하지만 각본에서 소설과 같은 치밀함을 가졌다. <써드퍼슨>에서 그의 이런 소설적 치밀함이 정점에 다다른 듯하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 사실과 허구의 뒤섞임, 공간과 시간의 엉킴으로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한다.
![]() |
||
| ▲ 영화 <써드퍼슨> 스틸컷 | ||
언뜻 세 커플의 알콩달콩한 연애 이야기인 것처럼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로맨스물의 탈을 벗어던진다. 세가지 이야기 중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소설가 마이클의 이야기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유명한 소설가인 마이클은 소설 집필을 위해 가족을 떠나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무른다. 그곳에서 그는 연인 안나와의 밀회를 즐긴다. 아름답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러운 안나와의 사랑놀이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
||
| ▲ 영화 <써드퍼슨> 스틸컷 | ||
3류 디자인 산업 스파이 스콧은 로마에 출장을 왔다 우연히 바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여자를 도와주다 사건에 점점 깊게 빠져든다. 순간의 실수로 아이를 잃은 그는 그녀의 아이를 구함으로써 자신을 용서해보려한다. 그러나 사건이 지날수록 그녀의 아이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호해진다.
![]() |
||
| ▲ 영화 <써드퍼슨> 스틸컷 | ||
뉴욕에 사는 줄리아는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판사를 만나야 하는 날 실수로 주소지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리고 결국 약속 시간에 늦는다. 결국 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줄리아는 좌절한다.
![]() |
||
| ▲ 영화 <써드퍼슨> 스틸컷 | ||
언뜻 전혀 상관없게 보이는 이 세 이야기가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교묘히 겹친다. 로마, 파리, 뉴욕에 있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이들은 영화 속에서 종종 서로를 스쳐지나간다. 파리에 있는 마이클의 호텔방을 뉴욕에 사는 줄리아가 청소하고 로마에 있는 스콧이 있던 자리를 마이클이 서성인다. 세이야기 속에서 아이는 항상 등장한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스콧, 아이 양육권을 빼앗긴 줄리아, 그리고 마지막 반전으로 마이클까지. 관객은 점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헷갈린다.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올라가 듯 점차 긴장감을 고조시키던 영화는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이것이 마이클을 중심으로 한 소설 속 이야기라는 것을 드러낸다. 스콧과 줄리아는 마이클이 쓰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다. 그걸 깨닫고 나면 영화 곳곳에 드러나던 복선들이 보인다. 안나가 마이클에게 소설에 대해 묻자 세 인물들에 대해 쓰고 있는데 그것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던 것, 모든 에피소스들에서 들려오는 “Watch me”의 메시지.
![]() |
||
| ▲ 영화 <써드퍼슨> 스틸컷 | ||
재밌는 것은 이 이야기들이 마이클 소설 속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현실과 허구가 분명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나는 실존인물이었나? 안나의 비밀로 소설을 쓴 마이클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밀리언달러베이비>로 히트를 쳤으나 그 후 몇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감독 자신을 투영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마이클의 이야기는 혹시 감독의 이야기는 아닌가? 영화는 기존 액자식 구성에서 벗어나 액자 안의 그림이 현실을 뚫고 나오고 그 그림을 보는 우리 현실에게까지 닿는다.
![]() |
||
| ▲ 영화 <써드퍼슨> 스틸컷 | ||
한 여름 낮에 즐기는 잠은 우리를 가끔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 자고 일어나면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몇 살 즈음 되었고 직업은 무엇인지 같은 것들이 금방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기억을 조금씩 찾아도 나라는 존재, 그 이물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현실은 어쩌면 긴 꿈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생이 끝나고 문득 눈을 뜨면 내가 전혀 모르는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수도 있다. <써드퍼슨>은 이런 데카르트적인 회의론까지 생각하도록 나를 밀어붙였다. 퍼즐맞추듯 영화를 적극적으로 보는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