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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이륙 전 01 – 그 곳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백은영 기자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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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IST 매거진=백은영]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에서도 하나 둘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누구도 서두르지는 않았다.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요란한 안내도 없었다. 그렇게 극장으로 들어서서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자 장내가 어두워졌다. 조용히, 영화가 시작되었다.

 
▲ 진한 향으로 부산에 머무는 내내 즐겁게 해줬던 영화의 전당 내 까페의 아메리카노.

  비올레타의 자살과 함께 영화 <천국에 간 비올레타>가 끝났다. 남은 건 까만 화면 위에 굴러가는 크레딧뿐이지만 극장 안은 여전히 어둡다. 관객들도 조용히 앉아 여운을 즐긴다. 크레딧을 끝까지 본 덕분에 실존 인물이었던 비올레타의 사진과 일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쏟아져 나온 관객들이 제각기 갈 곳으로 흩어졌고, 나는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다음 영화를 기다리며 이전 영화의 감상을 적어 볼 생각.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니 진한 향이 감돌았다. 지금부터, 지난 3월 부산에 열렸던 한·중남미영화제의 기억을 꺼내 보려 한다.

  6개월간의 남미 여행을 준비하는 나에게 중남미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4박 5일의 부산행에 올랐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예행 연습을 하는 기분이었다. 첫날 저녁부터 엄마가 보고 싶어 질질 짜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고, 서울과는 달리 인도에서 멀직이 떨어진 곳에 정차하는 부산 버스 기사님들의 박력에 소심해지기 일쑤였던 것. 부산이니까 초밥이 맛있을 거라는 단순무식한 기대와는 달리 초밥 맛집이라는 곳은 영 별로이기까지 했다. 며칠 동안에도 이렇게 많은 실패를 경험하는데 6개월은 얼마나 더 패배하고 좌절하려나. 그러니 예행 연습이라는 것이다.
  감상을 끄적이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니지만 분명 생경한 기분.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 속이지만 어느 정도 타인이 된 느낌. 여행이 주는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그 묘미까지 미리 연습해 보는 맛이 쏠쏠했다.

 
▲ <천국에 간 비올레타>의 한 장면. 칠레 민속음악의 거장 ‘비올레타’의 삶을 그렸다.

  남미에 대해 알고 싶다면서 그동안은 왜 ‘남미에서 찍은’ 영화만 보았을까? 바보 같은 일이다. 정말 남미를 알려면 그 곳의 풍경을 담은 영화도 좋지만, 진짜 남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봐야 할 것이다. 부산 한·중남미영화제에서 나는 ‘남미 사람들이 만든’ 영화를 여럿 보았다.
  영화 <천국에 간 비올레타>는 칠레 민속음악을 집대성한 가수 비올레타의 일생을 보여준다. 남미의 정서를 품은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칠레 사람들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영화 <품행>은 문제아라고 낙인 찍힌 찰라와 그를 둘러싼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품행’을 보여야 할지 말한다.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는 실제 인물인 작곡가 치코와 그의 연인 리타가 쿠바와 뉴욕을 넘나들며 겪은 일들을 느낌 있는 작화로 그려낸다.

   
▲ <천국에 간 비올레타>의 한 장면. 칠레 민속음악의 거장인 실존 인물 ‘비올레타’의 이야기다.

  진짜 남미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영화를 보며 나는 그 곳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생각했다. 비올레타가 민속음악을 수집하기 위해 무수히 걸었을 칠레의 산과 들을 마주 볼 때, 그녀의 노래 한 자락을 들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선 계획에 없는 쿠바에 언젠가 가게 된다면 리타처럼 노란 원피스를 입을 것이다. 

  여섯째,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 녹음의 절정의 순간으로, 큰 파도가 요란하게 모래를 쓸어 가다가 새로운 파도와 뒤섞일 때까지의 소리를 마이크가 매우 가깝게 쫒은 듯하다. 마리오가 내리 쏟아지는 파도 옆을 달리다가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끼리 절묘하게 섞이는 것을 녹음했을 수도 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바닷가 마을인 이슬라 네그라를 떠나 몸도 마음도 병든 네루다를 위해 그의 친구인 마리오가 그 곳의 소리를 녹음해 보내주는 내용. 녹음된 소리들을 듣고 네루다는  눈물을 보였을까?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리움에 젖은 미소 정도는 입가에 흘렸을 것이다. 작년 초, 이 소설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마음이 턱 하고 막힌 것 같았다. 멀리 있는 소리들이 귓가에 잡힐 듯 들려왔다. 차가운 바람 소리도,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도, 파도의 거친 소리도 딱 귓볼이 간지러울 만큼만 들리다가 사라졌다.

  ‘이 소리를 들으러 가야겠다.’
 

  여행을 다짐하는 순간은 이렇게나 간결하다. 남미에서의 반년이 그 곳의 일생들을 세세히 목격하고 깊게 느끼는 경험이 되기를, 경솔한 말이지만 단순한 여행이 아닌 삶의 한 조각이 되기를 감히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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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영 기자
baekeun0@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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