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의 폐허,
그 속에서 피어난 희망과 재건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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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F 케네디, JKF, 1960 | ||
[디아티스트매거진= 칼럼니스트 김동주]
Ⅴ. 한국전쟁후 문화의 새 물결. 그리고 맞춤정장의 전성기.
[이전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한국 맞춤양복에 대해 알아보았다.
관련 글 http://westage.tistory.com/699 / 지금부터는 전쟁 이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폐허 속에서도 버릴수 없던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 가득한 시대적 변혁을 바탕으로, 1950년대 중반부터 태동한 양복의 수요증가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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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기에 기능올림픽 신문보도, 1969년 | ||
1960년대 이후에는 대도시를 비롯, 지방의 소도시 중심가에도 양복점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때를 함께하여, 국내 원단 회사들이 생겨남으로써 양복지의 대중화와 양복 기술의 발전으로 전성시대는 1960년대말까지 계속 되었다. 한국인 특유의 정밀함과 노련한 손재주로1967년 스페인의 국제기능올림픽 맞춤정장 (양복) 부문에 출전한 홍근삼이 참가,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귀국 후 대대적인 카 퍼레이드 행사를 하는 등, 맞춤양복 업계의 당시 분위기는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이후 한국 맞춤양복 업계는 1969년 벨기에 기능올림픽에서 신두호가 또다시 금메달을 수상한 이후,
전무후무한 12연패 대위업을 달성, 명실공히 한국의 테일러 수준을 세계최고라고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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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벌신사, 1968 (출연: 구봉서, 서영춘, 송해, 허장강 등) | ||
위 사진 – 아버지가 물려준 양복 한벌로 파생되는 해프닝을 엮은 1968년의 코미디 영화, ‘단벌신사’. 이 시대에 양복 한 벌의 의미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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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cello Mastroianni | ||
위 사진-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_60년대 영화, 라 톨체 비타 (La Dolce Vita)에서 보인 그의 스타일은 이탈리아 수트를 세계적으로 홍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Ⅵ. 대중화, 기술 평준화의 시대
양복의 일반화와 더불어 기술 전수가 눈에 띄게 빨라짐에 따라 맞춤정장의 본격적인 저변확대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양복의 착장 문화 또한 변화를 보이는데, ‘착용’의 용도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연출’이 더해져 보다 다양하고 스타일리시한 정장이 많이 보급되던 시기이다. 상, 하의 다른 스타일로 맞춰 착용하는 소위 ‘콤비’ 재킷도 이 시대에 더욱 확대되었으며, 경제 성장과 더불어 원단회사 등장과 재직기술의 향상으로 정장의 고급화 추세로 나아가며 양복문화의 스펙트럼이 더욱 넓어진 시대는 기성복이 한국시장에 본격 등장하는 1982년까지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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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일합섬 맞춤여성복지 신문광고, 1973 | ||
Ⅶ. 기성복의 등장
유신시대를 거치며 한국의 문화전반에 효율성과 군사문화가 자리잡으며, 실용성을 넘는 ‘패션’에 대한 개념은 당시의 국내 분위기와 일정부분 괴리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과 저임금을 힘입은 7- 80년대의 봉제산업은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활황기였으며, 유명한 굴지의 해외 패션 브랜드들은 한국의 우수한 기술과 저임금에 매료되어 주문자상표부착 주문을 확대해 나아갔다.
세계적으로 맞춤양복이 쇠퇴하는 시기는 젊은이들의 스트릿 패션이 유행의 중심이 되는 70년대와 맞닿아 있었다. 바로 기성복 (Ready to Wear)시장이 태동되는 시기인 것이다.
소비수준의 향상으로 의류판매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복지회사들은 점차 대형화되었고 마침내 일부 대기업과 대형 복지회사에서 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기성복 제조시설을 갖추게 되면서 맞춤정장 업계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재능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기성양복업계에 진출, 조르지오 알마니는 니노 세루티에서 독립, 74년에 영국의 테일러링 전통에 도전하는 절제된 컨셉의 자기 브랜드를 런칭한다.
– 군사문화와 압축성장의 잔재 ‘빨리빨리!’ 문화, 기성복의 한계.
기성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의류시장의 한계는, 변별성의 부재와 획일화에 있었다.
몇 개의 사이즈로 미리 제작된 완성품은 구매의 편리함을 가져오는대신, 사이즈의 불만족과 개인취향을 반영하지 못하는데 그 한계가 있어왔다. 슈트는 다른 의상들과는 성격이 다르고, 포멀함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몸에 착 감겨야하기에, 옷이 가지는 임무는 캐주얼 의류들과 비교해 더욱 책임이 따를 수 밖에 없는데, 기성복의 브랜드화에 따른 마케팅 비용이 더해진 높은 가격대임에도 착용자에게 맞춰진 개인화 (Indivisualization)가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옷 대신 브랜드의 레이블을 산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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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stage & Co. 웨스티지 더 캐벌리] | ||
참고로 맞춤복을 다루는 테일러들 사이에서는, 고가의 브랜드를 기성복으로 구매한 후, 다시 부위별로 수선하여 착용하는 구매자들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자신에게 맞춰진 옷이 아님에도 브랜드의 레이블을 구매하는 댓가가 기혹함은 구매영수증 확인 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기성복에서는 Made to Measure 방식으로 고객의 사이즈를 잰 후 반맞춤 형식으로 판매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가봉단계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기성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
Ⅷ. 삶의 질, 맞춤정장의 부활.
‘빨리빨리’를 외치던 압축성장 시기를 지나 삶의 질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맞춤양복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옷이 주는 가치를 다시보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기업 경영자와 전문직 종사자 그룹을 중심으로 자신만을 위한 옷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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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춤양복의 발상지, 영국 런던의 새빌로우 배경의 영화 ‘킹스맨’, Kingsman 2015 | ||
옷에 대한 의미를 소비자 스스로 발견하면서, 오히려 슬로우 패션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기성복에서 구현할수 없는 제대로된 옷 만들기를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고, 인터넷과 정보의 발달로 좋은 옷에 대한 정보의 열람과 공유는 이제 무한대이다.
원단과 스타일을 테일러와 함께 고민하고 가봉을 위해 매장을 한 번 더 올 시간이 없는 사람은 맞춤 정장을 입을 수 없다. 그런 일련의 옷 만들기 과정을 음미하며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삶의 여유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작업실로 2030 세대의 맞춤정장 관련 문의 또한 연일 끊이지 않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맞춤양복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칼럼니스트 김동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패션 브랜드 웨스티지와 더 캐벌리 대표.
자연과 동물, 특히 산과 말을 좋아하고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히피.
이탈리아 피티워모,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며, 스타일리스트와 칼럼니스트를 병행하고 있다.
westage@westag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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