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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가 문자를 대신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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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메신저를 쓰다보면 문자 대신 이모티콘을 사용할 때가 많다. 종류도 다양하고 간편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이모티콘 하나가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한편으론 문자가 멸종되고 이모티콘만으로 소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호가 문자를 대체할 21세기 에스파란토어가 될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설치미술가이자 서예가인 쉬빙(徐冰)의 <지서>시리즈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리즈에는 판화, 애니메이션, 소설, 설치작품,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모두 문자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몇 달 전 한국에서도 출판된 <지서 : 점에서 점으로>라는 소설 형식의 작품을 보자. 100쪽이 넘는 책인데 온통 기호뿐이다. 문자로 쓰여지지 않은 책을 책으로 볼 수 있을까?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을 접한 사람들은 분명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 <地书 : 从点到点>중 일부, 2012년, 광서사범대학출판사  ©徐冰

  그러나 혼란함을 뒤로 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연속된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위 그림은 소설의 첫 페이지다. 새소리가 들리고 알람이 울려도 잠에서 깨지 못하던 주인공은, 고양이가 달려들고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큰일을 치른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미스터 블랙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물론 문자 텍스트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읽는 이마다 해석이 조금씩 달라진다. 하지만 국적이나 사용언어에 관계없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쉬빙이 기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어느 날 그는 껌 종이에서 씹던 껌을 종이에 싸서 버리라는 내용의 그림문자를 보았다. 간단한 기호 몇 개로 작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작가는 7년 간 세계각지의 기호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내놓은 결과가 <지서>시리즈다.

   
▲ <地书>소프트웨어 / <地书>설치작품 중 일부  ©徐冰

  작가는 세계 각지의 부호를 모아 정리하고 배열할 뿐, 새로운 부호를 창작하지는 않는다. 검증된 기호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의미를 파악하는데 헷갈림이 덜하다. 소설 버전의 주인공은 어느 도시에나 있을법한 샐러리맨의 전형으로, 작품을 주로 접할 도시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만하다. 이 밖에도 중문이나 영문으로 단어를 입력하면 기호로 변환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등, 여러모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신경 쓴 모양새다.

   
▲ <天书>,1991년  ©徐冰

  <지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인 <천서>와 여러 방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1991년 완성된 이 작품은 우선 크기로 관객을 압도한다. 4000개의 목활자로 인쇄된 책들이 전시장을 뒤덮고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글을 읽어보려고 할 테지만, 곧 그것이 한자도 아니고 내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라틴어와 한자가 섞인 기묘한 문자는 작가를 포함해 아무도 읽을 수 없다. 제목처럼 지상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언어로 쓰인 책인 셈이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천서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지서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문자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다만 <천서>가 해당문화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자체계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면, <지서>는 한발 더 나아가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유토피아의 이상을 담고 있다. 물론 <지서>의 기호문자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행위 동작 위주이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기호로 나타내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사회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소통방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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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웅
hjw1070@thearti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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